─────── CHAPTER 00 ───────조난 바람은 모래를 싣고 부지런히 거대한 둔덕을 옮깁니다.
당신은 비틀거리며 힘겹게 한 발짝, 또 한 발짝.
당신의 발자국은 새겨지기가 무섭게 흰 모래에 덮여 지워집니다.
그렇게 모래에 반 즈음 파묻혀 걸어가기를 몇 분,
눈가에 닿는 빛이 눈꺼풀을 비집고 들어옵니다.
검은 시야 주변으로 광원을 알 수 없는 빛이, 일렁, 일렁.
산티노 페라리:...... (한쪽 눈 뜬다.)
하늘은 창백한 푸름, 하지만 천구에 존재할 리 없는 유리질의 광택이 선명합니다.
─────── CHAPTER 01 ───────유리온실 눈꺼풀 너머의 따가운 빛이 아니었다면 영영 몸을 일으키지 못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좋은 아침, 아니, 좋은 오후라고 할까요, 산티노!
산티노 페라리:......? 꿈인가?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가장 먼저 시야에 드는 것은 거대하게 드리운 투명한 벽.
유리로 만들어진 벽은 천장까지 주욱 이어져 하나의 거대한
돔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윽고 들어올렸던 고개를 천천히 끌어내리면 주변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햇빛을 받아 백금색의 비늘을 뽐내는 호수의 등,
높이 자란 시무나무의 가지와 잎 새로 햇빛이 쪼개어져 아른거립니다.
당신의 단잠을 깨운 불청객은 이 반짝임이었군요!
산티노 페라리:여긴... 숲? 아니, 정원...인가. (상황을 파악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아직 잠이 덜 깬 기분이다.)
...! (내 짐은? 배낭! 바닥을 살핀다.)
바닥에 남은 당신의 소중한 자산은 그대로입니다.
애매하게 몸에 덮여 있던 외투가 바닥을 뒹굴기 시작합니다.
이불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던 것일까요-저게 얼마 짜리인데!
산티노 페라리:하아. (안도의 숨을 내쉴... 때가 아니군. 외투 집어들어 먼지 툭툭 턴다.)
안도일지, 분일지 모를 숨을 내뱉자면 목이 타오릅니다.
당장 탈수로 쓰러질 정도는 아니라지만 시원한-
아니, 미지근한 물이라도 마실 수 있다면 꽤 기분이 나아질 것도 같습니다…….
산티노 페라리:(수통은 있지만... 오아시스 같은 곳이니까, 마실 물이 있을지도 모른다. 외투를 걸치고 배낭을 메고, 마실 것을 찾아 걸음을 옮긴다.)
의외로 오지에서 생존하기에 적합한 인재였던 것일까요!
모래가 떨어져 나와 반짝이는 무기물을 남긴 손 끄트머리가 반짝거립니다.
온 몸에 그런 금빛의 반짝임을 두르고 있다면 그 ‘꼬질함’도 나름의 멋이 될 수 있겠다는 착각이 드네요.
산티노 페라리:(쓰러져서 그대로 죽는 줄 알았는데. 용케 살아남았군. 오히려 잘 자서 상태가 나쁘지 않다.)
(하지만 잠결에 이곳까지 왔다고 생각하기는 어렵고, 안도한 만큼 경계심이 들기에... 너무 소리를 내지 않게 조심하며 걸어간다. ...돈만 벌면 사막 쪽은 쳐다도 안 볼 것이다. 몸에 묻은 모래를 털어낸다.)
당신은 허황된 금빛이 아닌 진짜 금을 꿈꾸며 발치의 모래를 밀어냅니다.
머리 위로 하늘거리는 식물의 그림자가 최면을 걸듯 손짓합니다-
마지막
기억을 되짚어 보면 눈 앞에 번졌던 색 중 그 어떤 것에도 저리 선명한 초록은 없었는데!
산티노 페라리:정신| 기준치: | 35/17/7 |
| 굴림: | 34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정신이 천천히 맑아지며, 유영하던 기억이 제자리를 찾아갑니다.
목이 타고, 뺨에는 모래 맞은 머리카락이 잔뜩 붙어 있었던 감각이 선명합니다.
사막을 지나고 있던
이유에 대해서는 쉬이 떠올릴 수 없습니다.
눈을 몇 번 끔벅인 뒤 몇 번을 되새겨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유, 그것만이 머릿속에서 깔끔하게 절단당한 듯 공백으로 의태해 있습니다.
산티노 페라리:내가 왜 여기 있더라...... (의아해하며 우뚝 선다.)
당신은 큼지막한 식물이 그득한 정원의 한 가운데에 우뚝 섭니다.
그런 당신의 뒤로 고요히 다가오는 기척 없는 그림자가 하나 있었습니다…….
라이켄:(당신의 뒤, 두 걸음 즈음 떨어진 곳에 발걸음을 멈추고는 손에 든 나무 지팡이로 땅을 두 번 쳤다. 모래 튀는 소리, 사르륵.) 어딜.
라이켄:아직 회복이 덜 되었을테니 조금 더 쉬는 편이 나아. 아무리 튼튼한 인간이라 한들 사막의 열풍을 오래 맞고 바로 일어나 행동을 이을 수 있을 정도로 억세지는 않거든…….
이름 모를 인물은 옆구리에 끼고 있던 대야를 내려놓고는,
잘 닦이고 다듬어져 반들거리는 마호가니 빛의 나무 잔입니다.
산티노 페라리:...... ....... (놀라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입만 뻐끔거린다. 나무 잔과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 ....... (낯익은 얼굴에 한동안 시선이 머문다.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가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라이켄:(가만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다. 희미한 웃음기 어린 낯은 표정을 바꾸지 않은 채 눈 한 번을 깜박이지 않고 당신을 응시할 뿐이다. 다시 한 번 잔을 권하듯 손을 내민다.) 자는 동안 땀을 많이 흘리던데, 목이 마르지는 않나? 갈증이 가실 거다. 독은 들어 있지 않으니 안심하고.
……. 그리고 다시 한 번 조언하건대, 조금은 더 쉬는 편이 네게 이로우리라 여겨.
그리 이야기하는 이의 손에 들려진 잔 속에서는 액체가 일렁입니다.
나무의 색에 의해 액체의 색이 가려져 있으나,
수상한 진득거림은 느껴지지 않는 찰랑임이 햇빛을 받아 반짝입니다.
산티노 페라리:아...... 음. (더 따지기에는 목이 탄다. 잔을 받고 단숨에 마신다.)
매끄러운 목넘김, 희미한 풀내음-아마 약초의 것일테지요-과 달큰한 끝맛.
약초인 것은 확실한데, 정확히 무엇을 우린 물인지는…….
산티노 페라리:(내가 약초학자도 아니고...)
(수상해하기엔 갈증도 가시고 따뜻하고 나름 맛있다. 경계심을 조금 덜어낸다.)
....... (빈 잔을 들고 눈치 본다.)
라이켄:(눈치를 보는 당신을 응시하는 것은 건조한 붉은 눈 한 쌍 뿐이다. 빠른 깜박임 한 번, 잔이 비었음을 확인하고는 다시 고개를 들어 시선을 당신에게로 고정한다.) ……. 음, 이제 슬슬 움직여도 괜찮은가.
(혼잣말과 같은 중얼거림. 손을 뻗어 당신의 볼 위에 가져다 대어 본다. 서늘한 살갗 아래로 체온을 재는 듯 숨을 죽인 채 삼 초, 어느 정도 열기가 가셨음을 확인하면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떼어낸다. 이어지는 것은 끄덕거림.) 상태는 양호하군. 움직여도 좋다.
가볍게 몸을 씻는 것은 어떻겠나? 몸에 묻은 모래는 대강 털어 주었다만, 연고도 없는 자가 멋대로 몸을 씻겨 주기에는 무례가 지나치다 여긴 탓에.
산티노 페라리:(접촉에 긴장한 듯 굳었다가 손이 떨어지면 짧은 숨 내쉰다. 이어진 제안에는 말없이 고개 끄덕인다.)
라이켄:그래. 그렇다면 이것으로. (손가락을 내어 물이 담긴 대야를 가리키고는 멀뚱히 당신을 바라본다.) ……. 아, 물만으로는 부족한가? 그렇다면 이것도. (주머니를 뒤적여 수건과 종잇장으로 감싼 무엇인가를 당신의 손에 쥐어주고는,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비누다. 직접 만들었어. 쓰고 나서 나온 비눗물은 대강 바닥에 쏟아버리면 돼.
그것보다 너처럼 큰 덩치가 어디에서 씻어야 할지도…….
산티노 페라리:관찰력| 기준치: | 35/17/7 |
| 굴림: | 18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우뚝 선 바위와 거대한 수풀이 나름의 은신처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이름 없는 자도 당신과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던 모양인지, 작게 '아.' 하는 소리를 내네요.
라이켄:……. 그래, 저 곳이 좋겠군. 가. 씻어. 저 정도면 몸을 가릴 정도는 되겠지? 호수를 욕조 삼아 씻을 생각은 말고. 오아시스 물을 함부로 쓰면 안 된다는 것 즈음은 상식이잖아. (가벼이 머리칼을 쓸어넘겨 정돈하고는 손 끄트머리에 묻은 모래를 탁, 탁, 털어냈다.)
네가 몸을 닦는 동안 나는 먹을 것을 조금 가져오마.
그리 이야기한 이는 다시 길을 떠나려는 듯 몸을 돌립니다.
산티노 페라리:(비누와 대야를 들고 뒷모습을 지켜본다.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말 이상의 의도는 없는 듯, 뒤 한 번을 보지 않고 걸어나간 인물은 수풀 속으로 사라집니다.
그 붉은 시선은 숨을 죽여도 녹빛 안에서 번득일 것이 뻔합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당신이 그 눈빛을 잊지 못했을 리가 없지요.
산티노 페라리:(씻으러 은신처로 향한다.) ......진짜 오아시스였나. (꿈을 떠올리며 참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정글이 아니라 사막 한가운데 온실이라니, 그리고 분명 저 얼굴은.......)
기억에 왜곡이 있는 모양이군. (예지몽 같은 게 실존할 리 없으니까... 안 그래도 기억이 온전치 않으니. 왠지 스스로 라이켄이라는 이름을 붙인 낯선 이에게 드는 감정을 주의해야겠다고 다짐한다.)
당신은 이름조차 모르는 이에게 멋대로
라이켄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숨이 턱 막히고 머리가 어지러운 것은 대야에서 피어오르는 증기 탓인가요,
산티노 페라리:(종잇장 펴서 비누를 확인한다. 쓸만한 거겠지?)
상황과는 달리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비누입니다.
손가락으로 가벼이 문질러 보면 부드러운 촉감이 느껴지고,
그 표면을 따라 식물에서 추출된 오일 특유의 풋내가 피어오릅니다.
산티노 페라리:이런 것도 만들 줄 아나? (헛웃음이 난다.)
(땀 때문에 끈적해진 몸을 씻는다. 옷 속에 들어간 모래를 마저 털고 주섬주섬 다시 입는다. 구두를 가져온 것을 처음으로 후회한다. 여벌 옷이나 챙겨 올걸. 찜찜함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지만 한결 개운하다.)
(마음만 같아선 물에 몸을 담그고 싶지만, 당부받은 대로 호수를 욕조 삼아 씻을 수는 없다. 내가 어디로 가고 있었는지, 목적지를 기억해 내기 전까지는.)
(......빌붙어야겠군.)
여러 잡념-또는 집념이 흐르고, 몸의 물기가 말라갑니다
어느샌가 발 뒤꿈치 근처로 뱀 한 마리가 다가와 고개를 치켜들고 있습니다.
산티노 페라리:......?! (화들짝 놀라 몇 발짝 물러난다. 우당탕. 대야를 떨어뜨려서 주웠다.)
(물리는 줄 알았네...!)
당신이 대야를 떨어뜨린 덕택에 물이 모래 바닥을 흠뻑 적십니다.
운| 기준치: | 55/27/11 |
| 굴림: | 29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운 좋게도 물의 궤적은 당신의 발목을 약간 핥고 지날 뿐입니다만,
때마침 주변을 걷고 있던 행인에게는 그 행운이 미치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당신이 자연스레 라이켄이라 이름 붙인 이름 모를 인물은 태연한 낯으로 당신에게 다가옵니다.
라이켄:할리스 살무사. 야생에서 만났다면 위험했겠지만, 이 곳을 지나다니는 개체는 공격성이 없으니 앞으로는 그렇게 물을 떨구어서 구해달라는 요청을 하지 않아도 괜찮을 거다. (물이 약간 튀어 투명한 액체를 떨구고 있는 바구니의 아랫부분을 소맷자락으로 대강 닦아냈다. 가장 위에 올려진 치즈 한 덩이와 주황빛의 열매 몇 알을 집어 당신에게 건네 주었다.)
간소하지만 이것이라도 먹어라. 이 곳에 사람이 드나드는 일이 그리 잦지는 않은 탓에 준비해 둔 음식이 없었어……. 조촐한 대접이라 미안할 따름이군. 그러니까, (눈을 가늘게 뜬 채 당신을 올려다 보았다. 축축해진 치마의 끝자락을 꾹 쥐어 물을 짜내면서도 시선은 다른 곳으로 향하는 일이 없다.) 이름은? '그 쪽'이라고 부를 수는 없잖아.
산티노 페라리:(자존심을 세우며 거절하기엔 배가 고프다. 건네받은 음식을 허겁지겁 입에 집어넣었다. 일부러 오랫동안 씹으며 대답을 고민한다. 달리 특별한 답을 할 수 있는 게 아닌데도.)
......산티노 페라리.
라이켄:산티노 페라리. (그것을 복기하듯 두어번을 더 중얼거리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입에 맞느냐 물어보려 했는데 그리 급하게 먹으니 물을 필요도 없겠군 그래. 너는 이 근방의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아서 걱정했거든……. 소개가 늦었다.
라이켄. 이 유리 온실의 관리자다. 부르는 것은 라이켄이라는 이름으로 족해. (부족하다면 더 들어. 작은 소리로 덧붙이며 주변의 마른 바위 위에 바구니를 올려 두었다.) 고기는 먹나?
산티노 페라리:(이런 음식은 얼마만이더라, 기억도 안 난다-수사적인 표현이 아니라 말 그대로. 바구니의 음식을 빠르게 먹어치우며 여러 차례 끄덕인다. ...고기라는 말 한마디에 반응이 너무 열렬한가 하고 창피해졌다.)
라이켄:보이는 것 이상으로 먹는 양이 많군 그래. 내일의
사냥은 제법 격하겠어. (그러다가 체한다, 누가 빼앗아 가는 것도 아니고 전부 네 것이니 천천히 먹어. 그리 덧붙이고는 바위에 기대어 섰다. 당신이 식사를 마치는 것을 기다리는 듯, 팔짱을 낀 채 올려다 보는 시선이 당신에게는 퍽 익숙하게 다가올 법도 하다.) 오늘 준비한 음식은 그 즈음이지만 내일은 호쇼르나 보쯔를 만들 생각이거든. 조금 더 제대로 된 음식을 먹어야 너도 네 나름의 여정을 계속할 수 있을테니…….
산티노 페라리:......사냥? (비누도 직접 만드니 고기도 직접 잡는 게 이상하지 않다. 낯선 상황이지만 낯설지 않은 눈빛을 마주한다. 속에서 뭔가가 끓는다. 이 자식, 벌써 내쫓을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니, 처음 본 사람이니 당연히 떠날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이상한 건 내 쪽이다. 천천히 입을 연다. 생각 외로 경어가 자연스럽게 나온다.) 혼자 가시는 겁니까?
라이켄:종종, 방문자가 있을 때에, 필요할 경우에만. (손가락 끝으로 앞머리를 살짝 흩어 두고는 다시 팔짱을 낀다. 무엇인가 감내하는 듯한 표정에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나, 입 바깥으로 흐르는 의문은 없다.) 사냥은 혼자 나갈 예정이다. 사냥을 위해서는 온실 바깥으로 나가야 하고 너와 같은 일반인들은 길을 찾는 법을 모르는 것이 보통이니, 이 곳에 익숙한 내가 홀로 가는 편이 안전해. 몸집이 작아도 기본적인 사냥법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터라.
왜, 얻어 먹기만 하려니 미안한 마음이라도 드나? 너는 이 땅에 우연히 방문한 이의 입장이니 편히 머무르기만 해도 괜찮다, 산티노. (그리 말하는 입가의 옆으로 번지는 것은 퍽 호의적인 미소. 제 겉옷의 옷깃을 잡아당겨 옷매무새를 정돈하고는 턱을 감싸쥐었다.) ……. 정 돕고 싶다면 온실 안에서 할 수 있는 잡다한 일 정도만 부탁하마. 손님에게 품이 많이 드는 일을 맡기고 싶지는 않아.
산티노 페라리:(미안하긴 누가! 또다시 끓는 기분을 가라앉히며 가만히 내려다본다. 미간에 주름이 지는 것 같아 눈을 꾹 감았다 뜬다.) 꽤 정답게 부르시는군...요.
고마운 건 고마운 거지만. (성이 없으셔서 그런가? 비꼬는 말이 튀어나가려는 것을 눈굴림 한 번으로 참았다.) 왜 반말이신지?
라이켄:내가 알고 있는 한 서양식의 작명법은 이름과 성씨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지. '산티노 페라리'라 하면 '페라리'의 쪽은 가족의 이름, '산티노'의 쪽은 개인의 이름일테고……. 피를 잇는다는 것은 분명 의미가 있지만 그 피를 담는 그릇을 함께 보았을 때 한 개체의 이름이 되기 좋은 것은 그릇의 쪽이더군. 어느 곳에 담겨 있건 물은 물이니 그것을 구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그릇의 존재인지라. 달갑지 않다면 성씨의 쪽을 호명하마. (팔을 한 번 움직일 때마다 무게감을 지닌 두터운 옷이 직선적인 궤적을 이룬다. 몇 걸음을 걸어 빈 바구니와 대야를 주워 들고는 당신을 올려다 보는 앳된 낯.) 왜, 한참은 어릴 것처럼 보이는 낯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이 짧아서 마음에 들지 않나? 언어의 높고 낮음으로도 예를 비추어 주기를 바란다면야…….
몇 글자를 덧붙여 정중을 표하는 것은 일도 아니지요. 이 즈음이면 만족스러우시겠습니까? (표정과 낯빛 하나는 물론이요, 음성의 색조차 변치 않은 채 쉬이 말을 높인다. 옆구리에 빈 것들을 끼고는 바위 옆에 걸쳐 두었던 지팡이를 쥐었다.)
산티노 페라리:(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저질렀다. 싸우기 시작하면 내가 불리하다고 소소하게 절망했지만, 자기가 아는 라이켄이라면 이 정도는 웃어넘겨 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예지몽이 실존할 리가 없는데, 계시가 아니라면, 어쩜 이렇게까지 똑 닮은 존재일 수 있을까... 시비조의 말에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응해 주는 것 또한 라이켄다웠다.)
'서양식'... 새삼스럽군. (하지만 꿈속의 존재여서 쓸데없는 감정을 품다니, 이 얼마나 일방적인 관계인가... 말을 듣는 내내 착잡한 표정이었다. 상대가 말을 높이게 만들고 자신은 말을 낮춘다.) 뭘 도우면 되지?
라이켄:(고개를 옆으로 떨구듯 기울인 채 바라보는 낯에서 미소가 지워지는 일은 없다. 지팡이 끝에 달린 방울과 붉은 천이 흔들려 딸랑이는 소리와 함께 색색의 일렁임을 만들어내고, 온실 바깥의 모래 바람이 유리에 부딪히는 먼 발치의 소리가 평온을,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는 흰노랑빛의 햇빛이 온화를 노래한다.) 자연히 말을 놓으시는군요. (불쾌히 여기지는 않는다는 듯 퍽 유쾌한 눈웃음을 머금은 채이다. 단단한 바닥을 지팡이로 짚으면 찰랑, 반짝이는 소리가 산개한다. 은신처의 식물이 상하지 않도록 부드러이 앞을 향하는 발걸음이 퍽 조심스러워 기척이 흐렸다.) 당신의 선택에 맡기겠습니다. 만들다 만 새집을
완성시키는 것을 도와 주셔도 되고, 이미 만들어진 둥지를
나무 위에 올리는 것도, 아니면 비누를
포장하는 것이라거나. 많아 봐야 한 두 개 즈음만 할 수 있을테니 전부 하려는 욕심은 미리 내려 두십시오.
산티노 페라리:하, 그래. 웃겠지. 그러겠지....... (생각을 숨기지 않고 혼잣말의 형태로 뱉는다.)
(곰곰이 생각하다가.) 손재주가 좋은 편은 아니라서. 둥지를 올리는 게 그나마 할 만하겠군. ...새를 키우나?
라이켄:웃겠지라니, 꼭 저를 퍽 잘 아는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꿈 속에서라도 만난 듯 느껴지십니까? 혹 데자뷰라도 느끼는 모양인지. (몇 걸음 떨어진 길목에 서서야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그 곳에 가만히 서 있는다 하여 모래가 당신을 옮겨 주지는 않을텝니다, 산티노. (농, 그리고 뒤에 이어지는 특징적인 웃음. 찌푸리는 듯한 미소 뒤에는 기다림 없는 걸음이 이어졌다.) 그렇다면 둥지 올리기를, 부디.
키우고 있는 것은 새 뿐만이 아닙니다. 수많은 식물, 땅짐승, 날짐승……. 키운다는 말보다는 관리하고 있다는 말이 어울리겠지만 말입니다. 둥지를 올리다 보면 꽤 많은 것들을 볼 기회가 있을테니 한 번 눈에 담아 보시지요.
산티노 페라리:아는 척 나불대긴. 착각이다. (뻔뻔한 표정을 장착했다.) 그러고 보니 관리자랬나. 빚을 지기 싫으니 돕긴 하겠지만, 내 성격이 그리 좋지 않다는 건 알아 둬라. ......
정원사.
라이켄:제가 당신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아는 척이라 여기신다면, 역시 부정하기 어렵겠습니다. 알고 있는 보편적인 인간의 모습과 관찰한 바에 따라 유추하는 것에 불과한지라……. (정원사. 생소한 칭호에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정원사. 그런 역할에 기반한 호칭보다는 라이켄이라 붙은 이름 쪽으로 불리우는 편을 선호합니다. 제게는 얼마 허락되지 않은 타인의 음성이니 역시 지은 대로의 이름으로 호명되기를 바라게 되는군요. (하지만 당신이 정말로 '성격이 그리 좋지 않은' 인물이라면 결코 그 요청을 받아 제 이름을 불러 주지는 않겠지! 그리 자조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높다란 나무가 여럿 자라난 초원, 테이블 위에 올려진 작은 둥지가
5개.) 이것만 올려 두면 됩니다. 알아서 제 자리를 찾아 올테니까요.
산티노 페라리:알겠다, 정원사. (예상대로 못을 박듯 선호하지 않는 호칭을 택한다. 꿈에서와 같이 성격을 드러내기를 택했기에 몸가짐도 단정치 못하다. 타인 앞에서 힘을 빼고 걷는 것은 오랜만이다. 한 손을 주머니에 꽂고 삐딱하게 서서 테이블을 바라본다.) ...음. 그래.
라이켄:(가벼이 숨을 내쉬고는 체념한 듯 입꼬리를 끌어올릴 뿐이다. 빈 바구니를 테이블에 올려둔 뒤 둥지 하나를 조심스레 두 손으로 들었다. 익숙한 듯 주변의 바위 따위를 계단 삼아 나뭇가지 위에 둥지를 올린다. 앞으로 넷.) 제 손이 닿지 않을 것 같은 곳에만 올려 주시면 됩니다. 주변의 낮은 나무는 거의 자리가 그득 찬 탓에…….
산티노 페라리:어, 그러니까...... (둥지 하나 집어든다. 성질 부리더니 눈치를 보는 기색이 남아 있다. 나무 아래 서서 손을 뻗어 본다.)
하나, 작은 때까치 두 마리가 라이켄의 둥지 안으로 날아듭니다.
라이켄:눈치 보지 말고, 나뭇가지 위에 둥지 하나 올리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계속 그렇게 멀뚱히 있다가는 본인이 나무가 되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코웃음 한 번. 두 번째 둥지를 집어들고는 제 옆에 선 큼직한 나무를 턱 끝으로 가리켰다.) 마침 이 나무가 비었습니다.
산티노 페라리:나무가 되기는... 협박인가? (시키는 대로 팔 뻗어 둥지 올린다.)
둘, 되새 한 쌍이 당신이 올린 둥지 안에 웅크립니다.
라이켄:협박이라니, 말을 섭하게 하십니다. 몸이 두껍고 큼직하니 새들이 나무라 착각할 법도 하다는 생각에 한 말이었을 뿐, 인간이 식물이 된다는 발상은 퍽 독특하군요! (하, 시원한 웃음소리 한 번. 작은 나무 위에 둥지를 올려두고는 까치발을 내렸다.) 어느 공상 과학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입니다.
셋, 사막꿩 한 마리가 라이켄의 둥지에 자리를 잡자 어디선가 한 마리가 더 날아와 그 옆에서 깃을 고르기 시작합니다.
산티노 페라리:......그런 나무라면 되지 못할 것도 없지. 가만히 서 있는 게 돕는 것이겠군. (진짜 가만히 서 있는다. 한 발짝 물러서서 지켜본다.)
라이켄:아니, 가만히 있을 시간에 하나라도 더 올리십시오. 어차피 이 곳을 떠날 외지인인 당신이 이 곳에 뿌리를 박았다가는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 뻔하지 않습니까……. 자, 어서. (당신의 손에 작은 둥지를 올려 주고는 '당신 머리 말고 나무에 얹으십시오, 당신은 나무보다는 철옹성에 어울리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따위의 농을 덧붙인다. 어깨를 한 번 두드리더니 마지막 둥지를 손에 들어 적당한 나무를 찾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산티노 페라리:왜? 여기에 아예 뿌리박고 살지 못할 것도 없다. (언젠가 들은 '농담'처럼 무게를 싣지 않은 말이다.) 대충 보니 마음에 들었거든. (둥지를 네 손에 도로 반납했다.) 나뭇가지 부러뜨릴까 겁나니까 네가 해라.
......들어 줄 테니까. 잠시 실례하지. (허리 잡고 들어올린다. 두리번거리던 곳에서 방향을 돌려 높은 나무 앞으로 데려갔다.)
라이켄:이유에 대해서는 알릴 수 있는 바가 없으나, 적어도 이 땅이 당신을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 즈음은 알아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언젠가 당신은 이 곳을 떠나야 할 겁니다. 당신을 위해서라도……. 아. (손에 둥지가 들려진 것을 바라볼 틈도 없이 맨발이 땅에서 들어 올려진다. 가벼이 허공에 떠오른 꼴이 진화를 거듭하지 못한 원시적인 식물의 포자와 같은가, 화분에 불과한 무게일지도 몰랐다. 팔을 뻗어 가장 높은 곳에 둥지를 하나, 조금 떨어진 곳에 또 하나를 둔다.)
다섯, 자그마한 둥지에는 쇠종다리 한 쌍이 나란히 날아와 자리를 잡습니다.
라이켄:……. 그래서, 언제 즈음 내려주실 생각이십니까. (높은 곳과 추락에 대한 공포는 학습한 적이 없다. 제 허리를 감싸 잡은 투박한 손 위에 작은 손을 겹쳐 올리고는 두어번 톡, 톡 건드린다. 짧은 시간 교환되는 체온 중 적어도 하나는 서늘하다.) 계속 이리 허공을 산책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만.
산티노 페라리:하지만 너는 잘 살고 있잖아. (더 놀릴 생각이었지만 손이 겹쳐지는 것이 불쾌했다. 조심히 바닥에 내려주었다.) 자.
라이켄:저는
높으신 분의 명령에 따라 이 장소를 관리하는 관리자이니 이 곳에 자리를 마련할 수 있으나 당신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와 당신이 같은 선에서 존재할 수 있으리라 여기십니까? (문자 그대로를 해석한다면 오만하기 그지없는 말일 것이나 태도가 퍽 검소해 아주 콧대가 높아 보이지는 않는 몇 마디. 발이 땅에 닿으면 모래가 밀려나는 사악, 하는 소리만이 고요하다.) 감사합니다. 곧 해가 지겠군요…….
간단하게나마 다른 일을 도우시겠습니까? 아니라면 자리를 마련해 드리지요. 내일 부탁 드리고 싶은 일이 있으니 체력을 보충하는 것이 나으리라 여깁니다.
산티노 페라리:높으신 분의 판단이 꼭 옳으란 법이 있나? 혼자 관리하기 힘들어 보이는데. 오만하기 짝이 없군. (태도를 늘 고려 범위에 넣어서 정상참작하였다면 꿈속에서도 그리 재수없게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불만스레 모래를 신발코로 찬다.) 새집 만드는 걸 구경하고 싶다.
라이켄:시간을 들여 관리한다면 홀로라 한들 아주 해내지 못할 것은 없습니다. (짤막한 답. 옷에 묻은 모래를 가벼이 털어내고는 테이블로 걸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새집이라, 하나 즈음을 완성시키면 해가 완전히 지겠군요. 주변에서 나무 도막만 몇 가져와 주시면 됩니다. 구경을 위한 값이라 여겨 주십시오. (그리 말하며 발치에서 작은 상자를, 그 상자 속에서 상자보다도 자그마한 새집 하나를 꺼내었다. 반 즈음 완성된 새집은 아주 작은 새 한 둘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아담했다.) ……. 정말 구경만 할 심산입니까?
산티노 페라리:혼자라도 해낼 수 있다면서? 밥값을 하든 안 하든 곧 쫓겨나게 생겼는데, 친절을 베풀 이유가 있나. (팔짱을 끼고 서 있다. 완전히 남의 일을 구경하듯이 뒤에서 지켜보는 모양새다.) 조금 더 정중하게 부탁하거나...... 납득이 가게 설명해 주면 손가락 하나라도 보태 주겠다.
라이켄:반 즈음 협박을 하듯 이야기해 보자면, 당신을 이 온실 바깥으로 인도해 줄 수 있는 존재는 저 뿐이라는 사실을 들 수 있겠습니다. 그 동안 당신이 탈수나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모습을 모른 체 한다면 당신이
밥값을 하지 않는 것도 눈감아줄 수 있겠군요. (제법 서늘한 농을 던지고도 능청스레 웃는다.) 하지만 또한 라이켄은 그리 매정한 이는 되지 못합니다. 이야기를 해 두고 3분도 지나지 않아 스스로 가능성을 부정하는 꼴이니, 실상 당신이 나를 도와야 할 이유는…….
(잠시 말을 골라내는 듯 눈동자를 좌로, 우로 굴린다. 이윽고 몸을 일으켜 주변의 나무를 주우려는 듯 등을 돌리니, 이은 말을 내뱉는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이어지는 목소리는 높낮이와 색이 쉬이 변치 않아 그저 특유의 것이라고만 설명할 수 있는 웃는 낯에 어울리는 음성만으로 남을 뿐이었다.) 오롯 감정에 근거할 수 밖에 없겠군요. 그마저 내키지 않는다면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구경꾼 노릇을 하며 그렇게 남아 계셔도 좋습니다.
산티노 페라리:...... ...... (꿈속에서는 노련한 연기자였다지만, 열아홉의 산티노 페라리는 죽음을 쉽게 입에 담는 데 적응하지 못했다. '자네도 참 익살맞군' 따위 반어적인 칭찬으로 비꼬는 법도 잘 모른다. 한마디로 쫄았다. 표정을 지우고 발을 돌린다. 되갚아 주겠다고 이를 갈며—수사적인 표현이다. 치아는 소중하다—자존심을 잠시 접었다.) ...어. (그래, 하자, 밥값.......)
(주변에서 나무 도막을 찾아본다. ...별것도 아닌 걸 시키면서 재미도 없는 농담을 하는군.)
라이켄:다시 말하지만 저는 제 손으로 구한 생을 또 제 손으로 죽일 정도로 매정한 이가 아닙니다. 그러니 그리 겁에 질린 목소리로 대꾸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지레짐작, '라이켄'이라면 어렵지 않게 해내는 파악의 절반 즈음을 차지하는 것. 적당한 나무 도막을 세 개 즈음 줍고는 자리에 앉아 실톱으로 크기에 맞게 도막을 잘라내기 시작했다. 서걱, 서걱, 쓸모를 잃은 것들이 다시 자리할 곳을 찾으니 그야말로 재생이다. 상자 안에서 풀이나 못을 찾는 것인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틀어막힌 채 사각형 안을 돌아다녔다.)
도막은……. 하나 정도면 족하겠습니다. 대신 조금 크고 넓적한 것이 필요할 것 같으니 적당해 보이는 것이 없다면 그저 없다 이르고 돌아오십시오. 괜한 헛수고를 시키고 싶지는 않군요.
산티노 페라리:겁에 질리긴 누가... 아는 척 그만하라고 했다. (낮은 소리로 말하고 건성으로 찾아본다. 그리 멀리 나가지 않고 서성거렸다.)
산티노 페라리:관찰력| 기준치: | 35/17/7 |
| 굴림: | 47 |
| 판정결과: | 실패 |
크고 넓적한 나무 도막, 판자가 아니면 있을 리가 없지요!
분이 속을 긁어내고 눈을 흐리게 하는 탓입니다.
당신은 다시 한 번 땅을 둘러보며 뒤를 돌아보지 않을 핑계를 만들어 냅니다…….
산티노 페라리:관찰력| 기준치: | 35/17/7 |
| 굴림: | 52 |
| 판정결과: | 실패 |
(이 기분은 뭘까, 고민하는 것마저 시간 낭비다. 출처를 분명히 알고 있는 감정이니까. 현실까지 끌고 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안 보이면 돌아오랬지만, 면목이 없다. 문득 자신답지 않다고 느낀다. 아무리 희한한 꿈을 꿨다지만. 왜 자신을 온실 밖으로 인도해 줄 단 한 명에게 비위 못 맞춰줘서 본성을 드러내고 있지? 얌전히 입 다물고 고개 끄덕이고 부탁을 들어주기만 하면 되는 일인데 말이다. 무슨 배짱으로, 조난된 나를 구하고 간호해 준 사람에게 날카롭게 대하는 거냐고? 정신 차려라, 산티노 페라리.) 정신 차려. (고개를 세차게 젓지만, 머릿속에서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꿈은 떠날 기미가 안 보인다.)
...... 젠장. (중얼거리며 돌아간다.)
이봐. 여긴 없다.
라이켄:(한참을 집중해 나무 도막을 조립하다, 당신의 목소리가 들릴 때 즈음에야 겨우 고개를 들었다. 풀과 붓을 든 채로는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제대로 넘길 수 없어 제 어깨에 괜스레 고개를 한 번 비빈다.) 아, 없습니까? 그렇다면 할 수 없이 작은 것들을 이어 붙여 만드는 수 밖에는 없겠습니다. 해가 빠르게 떨어지는 탓에 그림자가 져 보이지 않는 것도 있겠군요……. 보통의 사람들은 밤눈이 밝지 못하니.
(그리 말하는 저 역시도 예외는 아니라는 듯 눈을 가늘게 찌푸렸다가 고개를 가벼이 털어 머리카락을 정돈하였다. 나무 상자를 뒤적여 작은 토막 여럿을 꺼내고는 그것을 이어붙여 넓이를 넓히기 시작했다. 집중을 하는 동안에는 말이 없는지, 본디 말이 많지는 않은 성정인지 한참을 그리 묵묵했다. 당신에게는 눈길 한 번을 주지 않은 채 손 끄트머리에서 만들어지는 새로운 보금자리를 자아내고만 있는 것이, 집이 되지 못할 곳의 뜰을 가꾼다는 점에서는 여전히 당신이 기억하는 정원사의 꼴이다.) …….
산티노 페라리:머리핀은 만들 줄 모르나? (네 모습을 보다가 구석에 앉았다. 네 1호 구독자였던 '어린시절'을 묵묵히 회상한다. 꿈과 겹치는 모습을 발견할수록 의심에 사로잡힌다. 제 눈앞에 있는 것이 그
재생의 새싹, 자신의 몸으로 재생을 몸소 보여준 괴물이라고... 하지만 위험인물을 앞에 두고도 이상할 만큼 마음이 평온해진다. 따스한 기분이 몽글거리며 피어나는 것 같기도 하다. 마치 어릴 때 읽은 동화를 다시 펼쳤을 때처럼.)
(추억에 사로잡혀 분노를 잊은 듯, 늘상 같은 무표정이 조금 유순한 빛을 띠었다.)
라이켄:만들 줄 모른다기보다는 만들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 뿐입니다. 가벼이 넘기거나 털어내면 그만이었으니, 자. 보십시오. (고개를 들어올려 대각선의 끝에 위치한 당신을 바라본다. 함께한다 하기에는 지나치게 먼, 하지만 별개의 길을 걷고 있다 이르기에는 또 가까운 모호한 거리, 충돌하지도 유리되지도 않을 최소한의 거리. 당신의 표정에서 노기가 가셨음을 알아채더라도 그것을 부러 언급하지는 않았다.) 이 정도면 시야에 방해가 되지는 않습니다. 정 방해가 되더라도 한 쪽의 눈이 있고요. (낯을 스치듯 지나가는 옅은 미소는 날카롭지 않은 끄트머리를 지닌 채 스몄다 다시 노을의 불그스름한 그림자에 묻혀 사라지고 만다. 필요했던 도막은 바닥이 될 예정이었는지, 이제 사방이 가로막혀 비로소 '집'이라 이를 수 있는 것을 손에 쥐었다. 그것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는 몸을 일으켰다.)
사막의 저녁은 마음에 드십니까. 노을의 황금빛이 퍽 잘 어울리는 것이, 몸에 금붙이를 두르지 않아도 꼭 이 시간에 놓이기 위해 단조된 것처럼 보이십니다.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줄줄이 내뱉더니, 상자에 새집을 넣어 두고는 테이블 아래에 상자를 밀어넣었다. 새집을 나무 위에 매다는 것은 오늘의 일이 아니었던 모양이지!)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풍경이라도 구경하시겠습니까? 이 곳에서는 생각 이상으로 빠르게 해가 가라앉으니 황혼은 순간입니다.
산티노 페라리:새를 위한 집도 지극정성으로 만드는군. 잘 봤다. (내일 부탁할 일이라는 게 새집 달기일까, 짐작하며 일어난다.) 아부는 필요없고. 안내해라.
라이켄:제대로 구경은 하셨습니까? 눈빛은 꼭 새집이 아닌 다른 것을 보는 듯 하던데요. (테이블 옆에 기대어 두었던 지팡이를 손에 쥐고는 식물이 무성한 곳을 가로질러 걷기 시작했다. 빛이 가라앉는 곳을 향해 걸으니 등 뒤로 그림자가 뻗어나온다. 거대한 나무 한 그루를 지날 즈음에는 잠시 멈추어 섰다.) 마침 길목에 있으니 미리 이르지요. 내일 새벽 온실 밖으로 나가 정오가 되어서야 돌아올 예정입니다. 그 동안 이 나무 뒤에 있는 구덩이를 메워 주십시오.
산티노 페라리:(무성한 초록이 뿌리내린 곳에서 위화감을 느낀다. 모래가 아니라 흙이어야 할 것 같은데. 이래도 식물이 잘 자라나? 온실 국가 규모의 오아시스라니.)
(불그스름한 노을빛에 반짝이는 모래알은 네 말대로 아름다운 금가루 같다. 하지만 발밑을 데우거나, 간혹 푹 꺼져 사람을 골탕 먹일 뿐, 사막에 넘치는 모래는 바다에 있는 물만큼 가치 없는 것이다. 시큰둥한 얼굴로 따라 걸었다. 네 그림자를 서슴없이 밟았다. 네 부탁-명령?에 보이지 않을 텐데도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 지팡이는 무슨 용도지? 걷는 데 문제가 있어 보이진 않는다만. 멋인가? (궁금한 것을 묻기도 한다.)
라이켄:알고 싶으십니까? 그리 예상하실 수 있다면 어떤 답을 남기지 않아도 나름의 답이 될 수 있으리라 여깁니다. 걷는 것에는 문제가 없으니 그 가능성만은 지워 드리겠습니다. 나머지의 공백은 상상으로 채워 보시지요. 옛 인간들이 별과 별 사이의 빈 공간을 이으며 그것에 이야기를 덧붙였던 것과 같이 말입니다. (말이 화려할 뿐, 실상은 답변을 않는 것과 다름이 없는 답이었다. 지팡이의 끝을 흔들면 작게 방울이 딸랑이지만 그것을 따를 양은 없으니 목자의 것이라 이르기도 모호한 물건이 쓸모를 알 수 없이 남을 뿐이다. 맨발로 모래를 밀어내듯 밟아 앞으로 나아간다. 온실 속에는 바람이 강하게 불어 오지 않아 두 사람 분의 발걸음이 사그라지지 않고 남았다.)
두 사람은 서걱이는 모래알을 밟으며 온실의 한 구석으로 나아갑니다.
야트막한 경사를 오르면 점차 지반은 멀어지고,
온실의 너머로 드리우는 노을이 땅을 금빛으로 물들입니다.
어느새 보랏빛을 머금기 시작한 사막의 하늘에 별이 하나, 둘, 은하수를 이룰 듯 모여들고,
식물의 초록이 닿지 않는 곳의 유일한 녹빛으로 남을 듯한 이는 하늘이 닿을 듯 트인 곳에서 걸음을 멈춥니다.
라이켄:자, 이 곳이 온실에서 가장 하늘이 잘 보이는 곳입니다. 식물이 드리우지 않아 살 바깥의 하늘이 어떠한 방해도 없이 눈에 들어오지요. 공기가 서늘해 잠에 들기에도 좋습니다.
산티노 페라리:(유리 돔으로 구분되어 있을 뿐, 바깥의 사막과 다르지 않은 풍경을 둘러본다.) 여기서 자라는 건가?
라이켄:왜, 모래 바닥에 몸을 눕히기에는 마음이 편치 못합니까? 옷이 더러워질까 걱정이라면……. (겉옷을 벗어 바닥에 깔아 주고는 주름이 지지 않게 탁, 탁, 위를 두드려 펼쳤다. 그것만으로는 모자라다 여겼는지 잠시 지팡이를 땅에 꽂아 두고서는 어디론가 사라졌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지니고 돌아온 것은 새하얀 천으로 만들어진 뻣뻣한 침구류였다. 그것을 손수 펼쳐 간단한 이부자리를 만들어내는 솜씨가 퍽 능숙하다.) 자, 이 즈음이면 야영을 할 수는 있을 겁니다. 평소에는 제 자리로 삼는 곳이니 장담하건대, 누워 보면 생각보다는 폭신하고 누워 있기 좋은 구석입니다.
산티노 페라리:(사막을 횡단하며 겪은 일을 생각하면 바닥에서 자도 불평할 수는 없겠지만, 호의를 사양하지 않는다. 고맙다는 말은 없이 음, 하고 이부자리에 앉았다.) 그럼 너는... 어디서 잘 거지?
라이켄:이 온실 전체가 저의 침대이니, 바라신다면 아예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 누워 아침을 맞이할 수도 있겠지요. 별달리 이리 오거나 저리 가라는 말을 않는다면, 이 둔덕의 한 구석에서 잠에 들 생각입니다. 모르는 사람의 존재가 지나치게 가까이 있거든 잠에 들기 불편하지 않겠습니까? (한 겹 얇아진 옷의 소맷자락을 매만지고는 등 뒤로 손을 넘겨 뒷짐을 졌다. 당신이 자리에 앉자 눈높이가 낮아져 올려다 보던 시선은 내려다 보는 것에 가까워진다.) 혹 지금도 휴식에 방해가 된다 생각하신다면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산티노 페라리:...... ...... ...... ...... ......아니. (아까까지 잘만 말했지만... 이상하게 들리지 않을까 자기검열하다가 이 한마디를 하기까지 참 오래 걸렸다.)
라이켄:그 '아니'는 어떤 말에 대한 부정입니까. 지금 자리를 비우지 않아도 된다는 말인지, 꼭 멀리 떨어지지 않아도 된다는 말인지에 대한 확인을 요합니다. (침묵이 길었던 탓입니다. 그리 덧붙이고는 지팡이를 한 손으로 붙든 채 허리를 숙여 맨 땅에 천천히 앉았다. 살갗에 모래가 들러붙는 것 즈음은 개의치 않는 것이 당신과의 대비이다. 앉은 자세로도 얇은 나무의 기둥과 같은 지팡이에서 손을 놓지는 않은 채 당신을 응시한다. 끝내 황혼이 밤에 잡아먹혀 온실이 넘실대는 어둠에 잠기면 붉은 눈의 빛만이 고요하게 그 존재감을 더할 터였다.)
산티노 페라리:...아니라고, 두 번.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듯이 지레짐작하는 게 네 특기면서 이런 건 왜 모르는 척이지? (시선을 피하며 구시렁거린다. 천천히 자리에 누워 눈을 감았다.)
...그리고, 라이켄.
산티노 페라리:말 놔도 된다. 애초에, 그... (변명을 쥐어짠다.) 같이 놓자는 뜻이었고. 어색하니까. (내일 아침에는 다시 변덕을 부려 예의가 없다며 꼬투리 잡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기분이 썩 괜찮다. 머리 위로 쏟아질 듯 반짝이는, 수많은 보석 같은 별이 마음을 낭만으로 물들여서일까.)
(이 순간도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라이켄:(잠시간의 침묵. 눈을 감은 채의 당신에게 제 표정이 보일 리가 만무하니 침묵이 지시하는 감정을 알아차릴 수는 없을 터이다. 눈을 감은 이의 버석한 낯을 바라보기를 한참, 이어지는 것은-) 아, 하하. 꾸며낸 것처럼 보이는 경어는 마음에 들지 않았나? 채 하루를 가지 못할 줄은 예상조차 하지 못했는데. (-퍽 경쾌한 웃음소리와 함께 자아내는 특유의 말씨이다. 이윽고 건조한 공기에 제멋대로 뭉친 당신의 머리카락을 한 번 가벼이 쓸어 넘겨 주고는 조심스레 몸을 눕혔다. 제 팔을 베개 삼은 채 하늘을 올려다 보면 별이 끊어지다 만 목걸이의 보석마냥 산개해 있다.) ……. 그렇다면 이 말은 원래의 말투로 할 수 있겠군 그래.
잘 자, 산티노.
허나 그 밤이 아주 차갑지 않다 여겨지는 것은 온실의 벽,
그 어떤 빛에도 방해 받지 않는 선명한 밤하늘을 천장 삼아,
그 어떤 존재에도 쫓기지 않을 안온한 공간을 침대 삼아.
아, 모습을 숨기지 않아도 살아, 도망치지 않아도 편할 수 있는 밤입니다.
주변의 모래를 기는 무언가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눈살을 찌푸리자면 눈꺼풀의 빈 틈을 도려내듯 햇살이 번득이니-
산티노 페라리:....... (더 자고 싶지만,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아까 들은 소리는 인기척이었나...)
정원사? (주위 둘러본다.)
주변에 작게 남은 발자국은 쥐의 것, 그것도 두 마리의 분량입니다.
정원사의 발걸음은 진즉 온실 바깥을 향한 것인지, 주변을 둘러 보아도 그의 기척을 느끼기는 어렵네요.
산티노 페라리:(아! 눈 질끈 감았다 뜬다.)
당신의 머리맡에는 식은 수태차가 한 잔 놓여 있습니다.
산티노 페라리:참....... (한 모금만 마셔 본다.)
미지근한 액체가 부드럽게 목구멍 속으로 넘어갑니다.
고소한 우유의 향과 달짝지근한 맛이 혀에 살짝 남고,
코 끝에 찻잎의 내음이 감돌 때 즈음이면 한 모금이 끝납니다.
산티노 페라리:다 식었네. (벌컥벌컥. 잔을 비운다.)
빠르게 잔을 비우면 정신이 서서히 또렷해집니다.
어제 라이켄이 무엇인가를 부탁했던 것도 같은데…….
산티노 페라리:지능| 기준치: | 50/25/10 |
| 굴림: | 84 |
| 판정결과: | 실패 |
(뭐랬더라....... 잠이 덜 깼다. 멍하니 허공 본다.)
산티노 페라리:(잠이 덜 깼다고 해야 할까. 그놈의 꿈에서 덜 깬 건 확실하다.)
노을을 등지고 서 있던 이의 낯은 퍽 선명히 떠오르는 것도 같습니다만,
모래의 금빛도 반짝임이라고, 그것에 눈길을 빼앗겨 목소리는 제대로 듣지 못한 것이 분명합니다.
애초 귀를 기울이고 싶은 목소리도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아마도요!
잠을 완전히 떨구어내지 못한 눈꺼풀을 밀어올리자면…….
산티노 페라리:관찰력| 기준치: | 35/17/7 |
| 굴림: | 11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정원사의 지팡이가 자리했던 곳, 그것을 대신하여 당신의 옆에 눕혀져 있던 삽이 눈에 들어옵니다.
어제 큰 나무의 뒤에 있던 구덩이를 메워 달라는 요청을 받았었지요.
라이켄이 돌아올 것은 정오 즈음, 앞으로 두 시간 반 즈음은 남았습니다.
산티노 페라리:(잊어버렸다는 핑계는 못 대겠다. 차 마신 값은 하도록 하자. 삽 들고 문제의 나무로 걸어간다.)
당신은 온실의 끝에서 벗어나 중심부로 향합니다.
그 나무는 다른 나무에 비해서도 확연히 커서,
무신경한 당신도 아주 어렵지만은 않게 원래의 장소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 나무의 크기만큼이나 큼지막한 구덩이, 그리고 흙더미.
산티노 페라리:(가장 먼저 자란 나무인가? 눈에 띄게 커다란 나무 올려다보고, 구덩이 안쪽 들여다본다.)
(귀찮군.......)
구덩이 속은 당신이 웅크릴 수 있을 정도로 널찍합니다만, 그 안을 구르는 시체는 없습니다.
산티노 페라리:....... (기대는 무슨... 그냥 혹시 몰라서 확인한 것뿐이다. 마른침을 삼킨다.)
(제 표정을 뜯어보며 기분 상했다 화났다 어쨌다 평가할 사람이 곁에 없음에도, 괜히 하품 한 번 한다.)
(흙더미에 삽을 꽂고, 퍼올려서... 구덩이를 메우기 시작한다.)
뭉쳐 있던 고체의 집합은 유체를 모방하며 빈 땅의 그릇을 채워갑니다.
따뜻한 아침의 공기가 피부를 간지럽히면 구슬땀이 한 방울,
분명 흙더미의 흙을 모두 옮겼을 터인데도 구덩이를 다 메우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습니다.
산티노 페라리:음....... (어쩐다? 삽질을 멈추고 주변 두리번거린다.)
관찰력| 기준치: | 35/17/7 |
| 굴림: | 84 |
| 판정결과: | 실패 |
주변을 둘러 보아도 보이는 것이라고는 평평한 땅 뿐입니다.
산티노 페라리:관찰력| 기준치: | 35/17/7 |
| 굴림: | 26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아, 아주 평평하기만 한 것은 아니군요. 적당한 크기의 모래더미가 쌓여 있는 곳이 있습니다.
조금 떨어져 있으니 오가는 고생을 조금 할 수도 있겠지만…….
산티노 페라리:귀찮군....... (한숨 쉬며 걸음 옮긴다. 시간도 많은데 못할 것도 없다.)
당신은 삽을 든 채 더미를 향해 걸어갑니다…….
산티노 페라리:관찰력| 기준치: | 35/17/7 |
| 굴림: | 3 |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모래 위로 드리워진 당신의 그림자가 홀로 움직입니다.
정확히는, 그림자가 드리운 땅이 움직이는 듯한 느낌입니다.
모래 더미로 의태한 무엇인가가 꿈틀거리는 것일까요-
천천히, 아주 느릿하게 눈 앞의 흙이 가라앉고 있습니다.
산티노 페라리:........................? (그 자리에 굳었다. 잘못 봤나? 손등으로 안경 밀어올리고 눈 비빈다.)
미세한 움직임은 아주 잠시를 더 이어지다 멈춥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기이한 일, 혹 바닥이 무너지는 것은 아닐까요?
산티노 페라리:지능| 기준치: | 50/25/10 |
| 굴림: | 70 |
| 판정결과: | 실패 |
그래요, 아무리 생각해도 가능성은 그 뿐입니다.
당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유일한 자산-당신의 신체를 지키려는 본능은 당신을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게 합니다.
그에 감응하듯 모래는 다시 한 번 사르륵, 소리를 내며 가라앉습니다.
산티노 페라리:지능| 기준치: | 50/25/10 |
| 굴림: | 56 |
| 판정결과: | 실패 |
최대한 머리를 차게 식히고 다시 생각해 보아도, 빈약한 상상력은 일전과 똑같은 가능성을 지시할 뿐입니다.
서늘한 느낌에 흘렸던 땀이 순식간에 식어, 그 소름 끼치는 느낌을 더해갑니다.
산티노 페라리:SAN Roll| 기준치: | 32/16/6 |
| 굴림: | 91 |
| 판정결과: | 실패 |
그 자리에서 몸이 굳습니다. 어쩐지 모래의 흐름이 더욱 빨라진 느낌이 듭니다.
아득해지는 현실감의 탓인가요-아니, 저 모래는 분명 움직이고 있습니다!
산티노 페라리:관찰력| 기준치: | 35/17/7 |
| 굴림: | 31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 (숨을 삼키는 소리. 가만히 서서 눈을 굴린다.)
옅은 공포 속, 모래알 하나하나가 눈에 밟힐 지경입니다.
모래는 넓은 사각형을 그리며 가라앉기를 계속합니다-
지반이 아닌 무언가의 경계, 그 틈으로 흙이 빠져나가는 것 같습니다.
본능적으로 시선이 꽂힌 그 곳에 무엇인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산티노 페라리:......하. (뱀은 아닌가. 참았던 숨을 내쉰다. 삽 끝으로 경계부를 콕 찌른다. 나름 용기를 낸 행동이다.)
캉, 쇠와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작고 맑게 울립니다.
당신이 꿈 속에서 부수었던 것 만큼의 굉음이 들려오지는 않습니다.
산티노 페라리:(제발, 꿈 생각 좀 그만하자! ...신경질적으로 삽을 치켜들었으나, 내리치지는 않았다. 부수지 않게 조심해서 파낸다.)
생각을 비우기 위해서라도 빠르게, 당신은 베일처럼 드리운 모래를 파냅니다.
당신의 눈 앞에 드러나는 것은 이음새가 틀어진 거대한 철문.
양 문이 비틀어져 생겨난 작은 아가리가 모래를 끝없이 삼키고 있던 모양입니다.
산티노 페라리:(잠시 망설이다 손잡이를 잡고... 당긴다.)
─────── CHAPTER 02 ───────모형정원 그 안으로 당신을 부르는 계단이 끝없이 아래로, 아래로.
쌓여 있는 모래 위에는 발자국 하나가 없습니다.
산티노 페라리:(자신을 겁먹게 한 게 괘씸해서라도, 별 거 없는 버려진 창고라는 가설을 증명하고 싶다. 심호흡하고 내려간다. 불빛이 없으니 여차하면 지팡이 대신 쓰기 위해 삽자루를 꽉 쥐고서.)
당신은 한 걸음, 앞으로 발을 내딛어 봅니다.
주변이 완전한 어둠에 휩싸일 때 즈음에는 당신의 발소리가 더욱 먼 곳까지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디까지 이어지는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들 때 쯤-
탁, 삽이 바닥을 내리찍는 소리가 갑작스레 크게 울립니다.
공기의 흐름이 바람의 결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거시적입니다.
막연히 알 수 있는 것은, 이 공간은 그저 버려진 창고라 하기에는…….
산티노 페라리:........................
(잠은 한참 전에 깼을 텐데, 또 머리가 멍하다. 보이는 것이 없음에도 계단을 딛듯 관성적으로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가다 제 발소리에 제가 놀라 멈춘다.)
(눈이 어둠에 적응하길 기다린다.)
지상과 꽤 멀리 떨어진 것인지, 눈이 천천히 어둠에 익숙해져도 당장 볼 수 있는 것은 눈 앞의 손과 발, 삽, 바닥 뿐입니다.
광원 없이 이 곳을 둘러보는 것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산티노 페라리:......헛수고했군. (혼잣말하고 다시 계단을 올라간다.)
운| 기준치: | 55/27/11 |
| 굴림: | 17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그런 당신을 다시 한 번 아래로 끌여들이려는 듯,
산티노 페라리:......그냥 넘어가게 해 달라고...... .......
(방법을 발견했는데 못 본 척할 수 있는 사람은 또 아니다. 손전등을 집어들어 모래를 털고, 전원을 켠다.)
계단 아래의 공간에 명과 암이 부여되기 시작합니다.
산티노 페라리:(불빛에 의지해 내려간다. 삽으로 경계하던 때보다 빠르게, 성큼성큼 걷는다. 난 조금도 겁먹지 않았으니까, 라고 되뇐다.)
당신의 걸음은 그림자와 분신이 되어 그 뒤를 따릅니다.
다시 돌아온 공간은 생각 이상으로 높은 천장을 가진, 원통과 같은 형태를 하고 있었습니다.
계단의 바로 옆, 오래된
책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빛이 스쳐간
벽면에는 무엇인가 빼곡했던 것도 같고,
산티노 페라리:(가까운 곳부터. 계단 옆의 책상을 손전등으로 비춰 본다.)
끝이 삭은 종이, 버석하게 말라 재처럼 흩날리는 잉크의 흔적.
손이 닿았다면 그 끝을 거뭇하게 물들였을 목탄…….
꽤 많은 것들이 모여 있습니다만, 당신에게 익숙한 물건은 아닙니다.
산티노 페라리:(내용은 전혀 알아볼 수 없나? 종이를 뒤적인다.)
글자는 손자국과 함께 번져 내용을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산티노 페라리:(재미없는 내용이군. 머리 아파서 별로 들여다보고 싶지 않다. 손에 거뭇하게 묻은 자국을 보다가 무언가 빼곡하게 있었던 같은 벽면으로 걸어간다. 빈 자리에 손을 문지를 생각이나 하면서.)
애석하게도, 벽면에 손을 문지를 정도의 넓은 공백은 보이지 않습니다.
책상 위에 올려진 것과 비슷한 도면이 그득히 찬 벽면,
손전등의 빛이 닿지 않는 곳까지 빼곡하게 종이들이 들어차 있습니다.
벽면 하나가 거대한 콜라주 작품으로 화한 것만 같습니다…….
산티노 페라리:관찰력| 기준치: | 35/17/7 |
| 굴림: | 10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얼핏 보면 평범한 동물의 구조도처럼 보이지만…….
아니, 이것은 구조도가 아닌 설계도에 가까워 보입니다.
새의 깃을 펼치게끔 하는 장치, 비행을 모방하기 위한 유선형의 계산.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진
모형의 기계적 해부도입니다.
산티노 페라리:허. ....... (책상으로 고개를 돌린다. 쓸 만한 종이와 필기구를 찾는다.)
당신은 목탄을 집어듭니다. 잉크 없이 깃털을 펜으로 쓸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종이를 뒤적여 보면, 그나마 공백이 많은 도면 하나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하다 못해
이끼마저 모형으로 만들어 두었는지, 이번에 집어올린 도면은 이끼의 설계도입니다.
산티노 페라리:설계할 게 있나? 고작 이끼를....... (목적을 잊고 한참 들여다보다 코웃음 쳤다.)
(옮겨 그릴 생각이었지만, 이거면 됐다. 이따 가지고 나가기 위해 챙기기만 한다.)
(바닥의 잡동사니를 신발코로 툭툭 찬다.)
무엇인가를 만들고 남은 나무 조각, 쇠 막대, 깃털…….
누군가는 쓸모를 다했다 여기는 것들이 잠들어 있습니다.
나무의 결을 다듬던 사포, 가지를 치던 가위, 망치, 톱…….
작은 손으로 다루기에는 꽤 큼직하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 생각이 처음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발에 채였던 빈 깡통 하나가 퉁, 퉁,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구릅니다.
……. 그리고는, 무언가 재질이 다른 벽면에 부딪힌 듯 독특한 소리가 한 번,
산티노 페라리:...? (굴러가는 깡통을 손전등 불빛이 쫓아가다 벽면에 가 닿는다.)
발치를 비추면, 공간의 중심-공백인 척을 하며 고요히 어둠 속에 숨어 있던 무언가의 형체, 그 일부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산티노 페라리:...... ....... (고개를 든다. 두려워하는 눈이 정면을 향한다.)
그 정체를 마주하지 않으려는 양, 시선을 느리게 쫓는 광원은 눈길이 향하는 곳의 아래를 비추고-
-그 시선의 끝에 존재하는 것은, 아주 거대한 파충류.
산티노 페라리:SAN Roll| 기준치: | 31/15/6 |
| 굴림: | 19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친다.)
당신이 주춤, 뒤로 물러나면 빛의 범위가 넓어져 그 외양이 더욱 선명히 드러납니다.
섬세하게 조각된 비늘, 똬리를 틀고 있음에도 당신의 큼직한 몸체의 몇 배는 될 듯한 거대한 실루엣.
재앙의 기둥과도 같이 솟아오른 머리, 선명한 세로의 동공이 당신을 관통하듯 응시하고 있습니다.
그리 서늘한 정적 속에서 하나, 둘, 셋…….
……. 허나 당장에라도 살아 당신을 집어삼킬 듯 존재하던 뱀은 미동조차 않습니다.
산티노 페라리:(으악!!!! 입술을 깨물고 비명을 참았다. 이제 진짜 끝이다, 꼼짝없이 죽겠구나 하고 있는데.......)
....... (이것도 설계로 만든... 인형 같은 건가? 한 발짝 다가가서 자세히 살핀다.)
맨들한 돌의 광택이 비늘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허나 아주 진짜와 같은 허구일 뿐, 이 거대한 뱀에게는 생명이 부여되지 않았습니다.
어림잡아 인간의 여덟, 크게는 아홉 배 정도는 될 법한 크기.
다시 한 번 고개를 들어올려 그 머리를 비추어 보면 뱀의 이마에는 흉터인지 무늬인지 알 수 없는 흰 색의 문양이 새겨져 있습니다.
산티노 페라리:(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대담해졌다. 손을 뻗어 돌-비늘을 만져 본다.) 이 정도 크기면 만드는 데 한참은 걸렸겠는걸. (별 쓰잘데기 없는 거나 만드는 줄 알았는데. 작품의 사실적인 묘사에 감탄한다.)
아름다워.......
(종이의 빈 부분에 문양을 옮겨 그린다.)
당신은 뱀의 이마에 새겨진 무늬를 모방해 봅니다.
산티노 페라리:지능| 기준치: | 50/25/10 |
| 굴림: | 34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숨을 내쉬면 의식하지 않아도 수많은 생각이 제자리를 찾듯 가라앉습니다.
습한 공기, 몸을 닦고 있을 때 즈음 호수에서 풍겨왔던 내음을 기억합니다.
머리 위를 가로지르던 두 마리의 새들을 기억합니다.
머리 위에 초승달을 얹은 뱀만은 하나였습니다. 어제의 낮에 보았던 그 뱀과 같은 종입니다. 틀림이 없습니다.
산티노 페라리:(온갖 동물들이 짝지어 다니는 가운데 고독하게 기어다니던 녀석.......)
(뭐랬더라. 할리스 사무사? 라이켄이 말한 종의 이름을 떠올린다.)
그걸 이렇게 크게... (거대한 뱀 조각을 다시금 올려다본다.)
(떠나기 전 천장 방향으로도 손전등을 비추어 본다. 생각보다 높은 공간이다 했더니, 저것 때문이었나.)
손전등을 비추자, 빛에 의해 보이지 않던 부분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높은 천장보다도 뱀의 몸체에 새겨진 흉터-혹은 상처에 눈길이 꽂힙니다.
주변에 널린 도구를 보면 이 뱀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인 모양입니다.
산티노 페라리:듣기| 기준치: | 20/10/4 |
| 굴림: | 27 |
| 판정결과: | 실패 |
빛을 등겨 표정을 알 수 없는 이는 들고 있던 양초를 꺼뜨리고, 곧장 당신의 팔을 붙듭니다.
라이켄:여기 있으면 안 돼, 당장 여기서 나가!
산티노 페라리:...? 뭐야, 뭘 그리 급하게...
라이켄:(당신의 팔을 그러쥔 손에 단호한 힘이 들어선다. 끌어당기는 힘은 어디에서부터 일어나는 것인지, 육중한 몸을 당장에라도 잡아 끌 듯 구는 이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다시 한 번-) 나가야 한다고 했어, 나가야 해. 어서! (-라 재촉할 뿐이다.)
산티노 페라리:...아, 알았다. (그 기세에 눌려 얼떨결에 잰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간다. 한 손에 쥔 종이가 구겨진다.)
라이켄:……. 네가 유순한 사람이라서 다행이야. (가라앉은 목소리는 일전의 흥분과 대조되어 상황 속에 파묻힌 불안을 드러나게 한다. 목소리의 끄트머리가 흔들리는 것을 붙잡을 새도 없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산티노 페라리:관찰력| 기준치: | 35/17/7 |
| 굴림: | 75 |
| 판정결과: | 실패 |
시야의 가장자리로 보이는 것은 거대한 뱀의 형체.
이마저도 라이켄의 손에 이끌려 지상으로 향함에 따라 멀어져만 갑니다.
행여 당신이 자신을 뿌리치고 다시 어둠 속으로 뛰어들까 겁이라도 나는지, 당신의 팔을 붙잡은 손은 힘을 풀어낼 줄을 모릅니다.
이윽고 뺨에 햇살이 닿으면, 그제서야 당신의 팔 위를 그러쥔 손의 떨림을 알아차리고-
인도자의 낯에 드리웠던 그림자의 베일이 녹아 사라지면 그 표정이 보기 좋게 굳어 있음이 드러납니다.
산티노 페라리:...저기. (작은 목소리로 말 건다.)
라이켄:……. (묵묵히 당신의 앞을 가로막고 서 자연히 구덩이에서 멀어지게끔 한다. 나무의 그늘, 그 경계를 울타리 삼아 당신을 붙들어 두고 나면 조심스레 뒤를 돌아 철문을 닫더니 그 상태로 한참을 말이 없었다.) …….
묻고 싶은 것이 많겠지. (몸을 일으키며 내뱉는 첫 문장은 그것이다. 당신에게로 고개를 돌리면 시선이 손아귀에 꽂히나, 그것에 대해 묻는 것은 제가 될 수 없다는 양 묵묵히 입술을 다물었다. 다가서기를 몇 걸음, 당신의 앞에서 아홉 걸음 즈음 떨어진 곳에 멈추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생각을 정리해. 식사를 준비해 올테니, 그 때에 다시 대화하지.
(제 등 뒤에 무방비하게 놓여진 철문을 흘긋 바라보듯 눈을 옆으로 흘겼다가, 다시금 눈동자를 굴려 당신을 바라본다.) 먼저 탁자가 있는 곳으로 가 있어. 어제 새집을 만들었던 그 자리에 있으면 준비가 되는 대로 찾아가마. (그리 이야기를 한 뒤 미동도 않는 것이, 당신이 먼저 발걸음을 옮기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저 역시 움직이겠다는 양 고집스레 땅을 딛고 서 있었다.)
산티노 페라리:(손의 떨림, 얼어붙은 표정. 당장 여기서 나가야 한다고 외치던, 절박함마저 느껴지던 목소리. 같이 계단을 올라오며 흐르던 정적을 떠올린다. 명백히 라이켄답지 않았다. 생각 정리는 입을 다물고 끌려가는 동안 충분히 했다. '지금은 아니'라고 느끼는 건 라이켄뿐이다. 눈앞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며, 미간이 좁아지고 눈이 가늘어진다. 나지막한 소리로 가장 우선되는 물음을 던진다.) 두려운가? (네가? 그런 물음이 뒤에 숨어 있다.)
라이켄:……. (땅에 나무를 심듯 박아 두었던 지팡이를 다시 뽑아 들고는 옷매무새를 정돈한다. 다시금 당신을 마주하는 낯은 특유의 웃음-건조하다 못해 작위적이며, 훌륭한 의태를 뽐내던 당신마저 헛된 것이라 비웃을 정도의 것, 하지만 당신이 무슨 짓을 저지르더라도 쉬이 깨지지 않았던 가면으로 남을 것-뿐이다. 그것에 대한 답을 내놓는 것도
지금은 아니라는 양 집게 손가락을 입가에 가져다 대고는 한 마디 말을 않았다.) 언젠가는 답을 주마. 아주 멀지는 않은 미래가 될테니 내 말을 따라.
산티노 페라리:싫다. (비뚤게 웃는다. 좀처럼 짓지 않던 표정이라 뻣뻣하게 보인다. 내가 언제 네 말을 들었다고... 해보자 이거지. 네 고집이 이기나, 내 고집이 이기나.) 말했지만 난 성격이 좋지 않아서. 명령에 복종하는 개가 아니거든.
라이켄:나 역시 명령을 내리는 입장의 존재는 아니다. 그런 존재가 명령조로 말을 전하고 있다면, 그 의중이 아주 가볍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릴 법도 한데……. (눈을 가늘게 뜬 채 당신을 응시한다.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적이면 늘상 짓던 표정이나, 꿈 속의 저와 지금의 제가 아주 다른 존재라면 그 찌푸림의 원인조차 뚜렷하지 않을 터였다. 한 발짝을 움직이지 않을 듯 무거이 땅을 딛고 있던 발이 다시 한 번 모래를 밀어낸다. 한 걸음, 두 걸음, 딸랑이는 방울의 소리가 그 뒤를 따르고, 당신의 바로 옆에 발이 닿을 때 즈음에는 한 번 멈추어 서기도 했다. 올려다보는 응시의 온도가 찬 바람을 맞은 과실의 표면과 같이 서늘하다.) 개가 아니라면, 너는 네 스스로의 명을 재촉할 정도로 어리석은 인간인가, 산티노 페라리?
산티노 페라리:수상하기 그지없는 네 말을 얌전히 따르고 연명하느니, 너에게 따져 묻다가 시체가 되는 게 낫겠다. 어차피 되살려 줄 거잖아....... (서늘한 시선에 지지 않으려는 듯, 끓어오르는 반항심을 담아 낮은 소리로 으르렁거린다. 흥, 한 번 코웃음 치더니 비꼬는 어조로 말한다.) 시간이 아깝다면 식사를 준비하면서 대화할까? 우리 대단하신 정원사, 관리자, 설계자께서... 겨우 내 질문 몇 개가 두려워서 피하려는 건 아닐 테고.
라이켄:아, 하하……. 그 대단하신 정원사, 관리자, 설계자 되는 이는 애석하게도 죽은 인간을 살리는 법은 몰라서 말이지.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눈의 위를 가린다. 그것을 떨쳐내려는 듯 고개를 젓자 꼭 당신의 마지막 말에 부정이라도 하는 듯한 꼴이 되고 만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저를 따라오라는 양 지팡이의 끝을 흔들어 방울 소리를 내니, 그것을 따르는 것은 당신의 몫이다. 이윽고 의사를 묻는 목소리 하나 없이 묵묵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산티노 페라리:모르는 거 확실한가? (웃음소리를 흘리며 발걸음을 따라잡는다. 옆에서 보폭을 맞춰 걷기 시작한다.)
라이켄:(그 질문에도 답을 남기지 않으려는 것인지, 혹은 상식적으로 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에 답을 남길 이유를 찾지 못한 것인지 침묵으로 화답할 뿐이다.)
라이켄은 온실을 가로질러 멀지 않은 구석의 모닥불 앞에 멈추어 섭니다.
사냥을 다녀올 것이라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던 것인지, 손질된 자고새 고기와 야생 파, 양파 따위가 나무 탁자 위에 가지런히 올라 있습니다.
라이켄은 옆을 흐르는 개울물에 손을 한 번 씻어내고는, 가죽 칼집에 들어 있던 칼을 꺼내 능숙하게 고기와 채소를 썰어내기 시작합니다.
산티노 페라리:(이번에도 한 발짝 물러서서 구경한다.) 왜 시치미 떼는지 모르겠다. (물론 허황된 꿈 외에도 근거가 있기에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이다.) 온갖 동식물에 이끼까지 만드는데 사람은 못 만들겠나. 네가 조각한 작품이지 않나? 그 뱀 말이다.
라이켄:사람을 만들어내는 것은 나의
임무가 아닌 터라. 작업실 구경은 재미있었나? (반 즈음 다져진 소에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하고는 미리 만들어 두었던 반죽을 꺼냈다. 일련의 과정 중 당신에게 눈길을 주는 일은 없었다.) 그 거대한 뱀을 완성하는 것이 내 임무이니 인간을 만들어내는 데에 쓸 힘은 없어.
산티노 페라리:네 작업실이면 뭐가 두려워서 나를 내쫓은 거지? 도망친 거라고 해야 할까. (고개 쭉 빼고 기웃거리더니, 후추 더 넣어 줘, 간섭한다.) 뭐, 그냥 인간도 아니고 나니까 너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을 거란 생각은 했다. 시간 낭비지.
라이켄: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반죽을 한 덩이 떼어내고는 그 안에 준비된 소를 넣기 시작했다.) 기억, 또는 자아겠지. 그것이 없는 인간은 형체를 동일하게 만들어낸다 하여 온전히 만들어졌다 이를 수 없다. 내가 만들어내는 것에는 그 속이 없어. 그저 진짜를 흉내내며
의태하는, 비어 있는 껍데기에 불과한 것이지.
그것을 다시 되살리는 것, 다시 말해 재생이라 이를 수는 없을 테야. (완성된 보쯔 하나를 찜기 위에 올려두고는 일련의 과정을 반복했다.) 지금 내가 빚고 있는 이 보쯔들을 네 모양으로 빚는다 하여 그것이 네가 되는 것은 아닌 것과 다름이 없어. 나와 같이 생각을 하는 인간의 모형을 만들 수 있는 권한은 내게 주어지지 않았거든.
산티노 페라리:(중의문에 주의해라, 그거 꼭 너도 모형이라는 말로 들리니까. 지적하며 대수롭지 않은 듯 웃는다.) 불가능한 건 아니란 소리군? 허락받지 않았을 뿐.
라이켄:아니, 불가능해. 인간의 기억을 계승하는 법은 모르거든. 애초에 나기를 인간의 꼴으로 나 그 생각을 이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나와는 달라, 인간들의 숨은 한 번 끊어지면 이 형태로는 이어질 수 없어. (즉, 당신의 지적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답이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 것인지, 담담히 식사를 준비하며 내뱉는다는 말은 기이하기 짝이 없는 사실들의 나열이었다.) 나는 이 온실을 만들고 관리하기 가장 적합한 형태로 만들어진 인형이다. 즉,
전신이 될 것이라고는 없으니 온전하지만 인간이라 부를 수는 없는 존재야. 적어도 부여받은 바로는 그렇지. (이 말을 할 때 즈음에는 다시 한 번 앞머리가 흘러내려 완전히 이마를 덮었다. 그 상태로 잠시 정적, 말을 이어간다.)
하지만 인간은, 너는, 산티노 페라리는 달라. 이전이 있고 자신이 있는 존재이지. 인간이란, 늘 그리 존재해 왔어. 그런 것들은 모형으로 만들고 모방한다 하여 완전한 개인으로 존재할 수는 없지. 말을 조금 더 확실히 해 둘까, 산티노.
(어느샌가 보쯔가 가득히 찬 찜기를 냄비에 넣고는 그것을 모닥불 위에 걸쳐 두었다. 탁자 위의 성냥을 돌로 만든 팔찌에 긁어 불꽃을 일으키더니, 겁도 없이 장작 위에 던져 불을 붙인다.) 동식물에, 이끼에, 거대한 뱀도 만들 수 있는 나는 너를 빼닮은 인형을 만들 수는 있어. 하지만…….
너, 산티노 페라리를 되살릴 수는 없다. 답이 되었나?
산티노 페라리:(네 말을 들으며 곰곰이 생각에 잠긴다. 자신이 인형임을 인정하는 말에도 어째서인지 별로 놀라지 않았다. 비슷한 형태의 배신을 경험한 적 있기 때문일까. 팔짱을 끼고 수염이 지저분하게 자란 턱을 쓸어본다.) 대단한데? 그런 위치에 있는 네가, 사람의 목숨이 한 번뿐이라 귀중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단 게... 막상 살아 있는 인간인 나는 그 이론을 믿지 않는데도. (역시 헛꿈일 뿐이었다. 자신이 기억하는 라이켄의
전신이란 망상의 산물이고, 눈앞의 이는 다른 존재임을 받아들였다. 동시에 뭔가가 깎여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숨을 내쉬며 침음했다.) 음.
언젠가 떠나야 할 이질적인 존재를, 이 인공 정원에 들인 것 또한, 그런 위선적인 이유인가. 조난자가 죽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라이켄:그것보다 더한 위선적인 이유가 있다면 어떻게 반응할 생각이야? (당신의 꿈을 알 리가 없는 현실의 조각은 가상조차 되지 못해 진실을 재촉한다. 탁자를 사이에 둔 채 당신을 바라보다, 그 위에 두 손을 얹어 당신을 향해 몸을 슬쩍 기울였다.) 나는 네가 죽는 것을 바라지 않는 것이 아니야. 그보다 더 거대한 것을 원해. 인간들이 세는 날짜로는 한 세기가 넘도록 고대해 왔던 일이다.
이 곳은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한 것을 위한 공간, 그가 아끼는 것을 보관하기 위한 모형 정원이야. 하지만 동시에 인간에게는 재앙의 뿌리가 될 공간이기도 하지. 누군가의 행복을 위해 지어올린 허상은 또 누군가의 현실에 불행을 흩뿌리고 말아. ……. 내가 만들고 있던 그 거대한 뱀이 완성되면 그것이 실현될테고.
두렵느냐 물었지?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지금 내어주마. (뜸을 들이듯 부러 주변을 원형으로 맴돌았다. 몸을 숨길 곳 하나 없는 사막의 모방은 좋은 은신처가 되어주지 못하며, 그 속의 이질적인 녹음으로 존재하는 것은 색으로 녹아들지도 못하니 무용한 몸짓일 뿐이었다. 빈 그릇을 들어 냄비 안에 있는 보쯔를 올려둔다는 핑계로 등을 돌린 채 표정을 숨겼다.) 그래, 두려워. 네 질문 즈음은 두렵지 않았으나 주술이 걸린 이 몸으로는 그것들이 너를 해하려 했을 때 너를 돕지 못했을테니, 너를 잃는 것이 두려웠어.
왜냐하면……. 지금의 내게는 네가 필요하니까.
산티노 페라리:(분명 원래의 라이켄... 아니, 제 머릿속의 허상보다 납득이 되는 사상을 가진 자라고 생각했다. 시체가 잃어버린 생, 그 빈 부분을 사람이 아닌 것으로 채워 엮어낸다고 해서 재생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데 동의하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곳을 보며 석연치 않은 상념에 젖었다...)
(다시 네게 관심을 기울인 것은 재앙이 언급되었을 때였다. 네게서 멀어지려는 듯 구석으로 물러났다. 등을 돌리자 차라리 반가웠다. 표정을 숨기고 싶은 기분은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두려운가 물었으나 이제는 자신이 라이켄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귀를 의심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헛생각이 나래를 펼치지 않도록, 이것은 시체조차 되지 못하는 모형임을 의식적으로 상기해야 했다.)
그는 누구지? 그것이라는 건? ...시간이 안 되었다면서, 순순히 설명하고 있는 이유는 또 뭐고? (마지막은 듣지 못한 척 되물었다.)
라이켄:그라 함은, 다시 말하지만 입에 담기 어려울 정도로 위대한 존재.
그것이라 함은, 또 다시 말하지만 재앙. 거대한 뱀이 완성되면 이 곳은 하나의 거점이 되고 말아. 인간에게 위협적인 존재들이 이 곳으로 모여들고, 그들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수많은 이들에게 위험이 닥치게 되겠지. 이 이상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보쯔 한 그릇을 들고 돌아와 당신의 앞에 그것을 내려두었다. 그 눈 앞에서 태연히 입을 벌리면 그 혀 위에는 날 적부터 자리하고 있었을 초승달 모양의 낙인이 남아 있다. 즉, 무언가의 주술이 혀를 묶고 있음을 알리는 것이다.) 먹어. 인간의 몸은 쉽게 허기를 느끼니까.
순순히 설명을 하는 이유? 방금도 이야기했지, 지금의 내게는 네가 필요하다고. (팔짱을 낀 채 담담히도 고개를 들어올렸다. 티 하나 없는 웃음이 건조하게 자리한다. 이마를 덮고 있던 앞머리를 그제서야 살짝 쓸어넘기니, 당신이 기억하고 있을 모습의 각각이 적절히 뒤섞인 꼴이다.) 그런 이를 설득하고 납득하기 위해서라면 흐름을 거스르는 것 즈음이야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지.
산티노 페라리:...그 고기도 돌과 나무로 만든 것이 아닌지 어떻게 믿고? (쉽사리 손을 뻗지 않았다.)
라이켄:먹는 것을 가지고 장난질을 할 정도로 악의적이지는 않아. 어떻게 하면 믿어줄텐가? 조리 과정은 이미 눈으로 모두 보았잖아.
라이켄:인형은 먹지 않아도 돼. ……. (후, 가벼운 한숨 한 번, 고집을 부려 보아야 제게 득이 될 것 하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순순히 가장 작은 크기의 보쯔를 들어 한 입 베어물었다. 인형이라 한들 기본적인 감각 즈음은 있는 것인지 뜨거운 음식물이 입 안에 들어오자 눈썹이 꿈틀거리는가 하면, 후추가 많이 든 탓에 맛이 약간 매콤해졌다는 중얼거림을 덧붙이기도 했다. 제가 물었던 보쯔의 단면을 보여 주면 속에 든 것은 확연한 고기와 야채의 뭉침이다.) 자, 증명은 충분한가?
산티노 페라리:(김도 모락모락 나고 있고, 반응을 보니 꽤 뜨거운 모양이다. 고개를 끄덕였지만 집어들지는 않았다.) .......
라이켄: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 (온전한 보쯔 하나를 집어 당신의 입 앞으로 가져다 대었다.) 이리 해 주어야 먹을 생각인가? 뜨거워 보여서 그래?
산티노 페라리:(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서야 입을 벌려 묻는다.) 왜 내가 필요한지도 부연설명이 허락되지 않은 부분인가?
라이켄:아니. ……. 제 입으로 묻다니, 그래도 완전히 불신에 찬 상태는 아닌 모양이라 다행이군 그래. (손에 든 것을 도로 접시 위에 내려놓고는 먹다 만 보쯔를 마저 입 안에 넣었다. 한참을 우물거리고 있다가, 한 문장의 짤막한 말을 내뱉는다.) 이 곳을 무너뜨릴 생각이거든.
재앙이 찾아오기 전에 그 땅 자체를 없애는 거야. 하지만 내 손으로는 할 수 없어. (손가락으로 제 입가를 두드린다. 혀를 묶어두는 주술과 같이 제 손과 발을 묶는 것 역시 존재한다는 양. 호선을 그리는 입술과 흔들림 없는 시선은 거짓을 이른다 하기에는 너무나도 선명하다.) 그러니 네가, 이 온실 바깥의 존재가 필요해지는 것이지.
지금의 내가 바라는 것은 그것 하나 뿐이야. 이 곳의 완성을 막아 예정된 재앙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 네가 필요했기에 너를 이용할 심산으로 너를 구했어. 이기적이기 그지없는 생각이지. (말을 이음에 따라 목소리가 천천히 침강한다. 고요에 가까운 마지막 중얼거림이 멎을 때 즈음에는 턱을 괸 채, 눈만 슬그머니 올려 당신을 바라보는 낯이 되어 있었다. 그림자를 거두어내듯 고개를 털어내고 머리를 들어올리면 그제서야 드러나는 것이 있으니, 웃음에 묻어나는 풍화된 자조이다. 한 세기의 모래 폭풍이 스치고 지나간 흉 하나 없는 자리.) 원하던 쓸모는 아니었나, 산티노…….
산티노 페라리:어차피 무너뜨릴 오아시스라면 호수에서 시원하게 한 번 전신욕을 할 걸 그랬군. (재앙인지 뭔지, 세계 수준으로 무거운 문제에 진지하게 임하고 싶지 않아 부러 가볍게 대꾸했다.) 반역자가 될 셈인가?
그 위대한 존재는 네가 나를 끌어들이길 바라지 않을 것 같다만.
라이켄:바깥에서 해, 네게는 허락된 세계의 나머지가 한없이 넓게 펼쳐져 있으니까. (당신의 가벼운 물음에는 후후, 나직한 웃음을 터뜨렸다.) 반역자, 수도 없이 많은 이름을 붙여 주는군! 그래도 여전히 듣고 싶은 것은 라이켄이라는 이름이야. (제 귓가를 살짝 매만지고는 숨을 들이켰다.) 그 어떤 역할도 부여되지 않은 이름은 그 뿐이라서.
산티노 페라리:그래, 이곳이 무너지면 어떠한 수식어도 없는 '라이켄'으로 돌아가겠군. (왠지 못마땅한 듯 인상을 찌푸린다.)
라이켄:그 위대한 것은 네 존재를 주시하고 있지 않아. 아마 존재조차 알지 못할 가능성이 높지. 차라리 직접 그 형체를 만들고, 임무를 부여한 나의 존재에 가끔 시선을 둔다면 모를까……. 어쩌면 나의 존재조차도 알 바가 아니라는 듯 행동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야. (잠시 말을 고르듯 입을 다물었다가, 주저 없이 내뱉는 말은 이 따위의 것이다.) 그 위대한 것의 뜻이 어떻든, 나는 바라고 있어. (또한 주어조차 없는 말은 당신의 찌푸림에 웃음으로 맺어지고 만다. 시선이 아래로 떨어진다.) ……. 산티노 페라리.
네 손길이 내게 주어지기를 바라. 가능하다면 네 이름의 끝에 따라붙은 쇠를 녹이고 단조하는 그 불길이 전해지기를 바라. 오롯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니…….
신마저 두려워할 화마를 나에게 전해, 내가 프로메테우스와 같은 운명에 처한다 하더라도. 누구도 알아주지 않을 일이라 한들 나는 바라고 있어.
산티노 페라리:그걸 끄집어 내나? 하지만 난 불과 가까운 존재가 아니거든. (보쯔를 하나 집어 입에 넣었다. 입천장이 따가웠다. 이쯤 시간이 지났으면 식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안쪽은 아직 뜨끈했다.) 네 입으로 말했잖아.
피를 잇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이름이 되기 좋은 것은 그릇 쪽이라고. 그릇도 그릇 나름이지. 난 거창한 척하지만 찻잔 받침보다 작아서 아무것도 담지 못할 그릇이다. 사회가 바라는 성자, 위선자도 되지 못하고... (그리고 또 한 번의 실패가 있었다. 시간을 되짚어 떠올린다. 그건...)
정신| 기준치: | 35/17/7 |
| 굴림: | 99 |
| 판정결과: | 대실패 |
(바라보지 않으려 했는데 네게 시선이 닿았다. 묻어 두고자 했던 꿈의 기억이 수면 아래부터 치고 올라온다. 목이 메고 가슴이 답답하다. 분명 뜨거운 것을 잘 씹지 않고 삼켜서 그럴 것이다. 고작 이 말을 하는 게 그토록 힘이 들 리 없다.) ......악역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다.)
어디에도 섞이지 못한 채로, 제자리를 찾아 사방을 헤매어 왔지. 그런 내게 뭘 맡긴다고... 감당할 수 있겠나, 라이켄.
위대한 것이 부여한 임무가 사라지면 너는 어떻게 되는 거지? 프로메테우스와 같은 운명이라면, 끈 떨어진 인형 신세로 작동을 멈추나? 존재하지만 행동할 수 없게 되나? 말해 봐라....... 지금 자살을 도와 달라 요구하는 게 아니라고, 확실히 말해.
라이켄:(가만 침잠하는 듯한 음성에 눈을 깜박이다, 어딘가 버거운 듯한 낯을 한 당신과 시선을 마주한다. 사막과 가장 가까운 검정은 그 모래에 짓눌린 생명의 역사와 응축, 인간들이 이르기로는 석유라는 이름이 붙은 것-그 진득한 색을 닮은 이가 스스로를 불과 가까운 존재가 아니라 논하는 것에는 의아함을 느끼기라도 하는 것인지 고개를 옆으로 툭, 떨구었다. 화마, 반역, 저항. 퍽 무거운 이야기를 내뱉으면서도 낯빛 하나 변치 않는 것은 그
기억의 복제인가! 숨을 들이쉬어 붙든다. 호기와 함께 말을 이었다.)
어떤 것에도 섞이지 못하고, 어떠한 역할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다는 것은 또한 무엇에도 섞일 필요가 없으며 어떠한 이름에도 묶이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야. 그 모든 것을 하나로 묶는다면, 자유. 인간들이 수많은 역할을 쥐고 있음에도 타인을 마주하는 첫 순간 하나뿐인 자신만의 성명을 내세우는 것 역시 그들만이 지닌 자유의 일면이라 할 수 있겠지.
(라이켄. 이름이 불려졌다. 붉은 눈동자가 초점을 명확히 하며 당신을 응시한다. 수많은 것들이 주변을 스쳐 지나감에 따라 무명은 결핍이 되고 무아가 된다. 이름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한 때는 공백만을 남길 수 있었으니 그것을 채우기 위해, 타와 자를 구분하기 위해 스스로 붙인 이름은 라이켄-제 손으로 만들어내기 가장 어려웠던 하찮고도 억센 생의 형태. 인간의 음성으로 그 음절이 재생되면 이름을 지을 적 홀로 부여했던 의미를 재생시키게 된다. 어쩌면 그 이름을 붙인 순간부터…….)
애석하게도 미래를 볼 수 있는 마법사는 아닌지라, 프로메테우스의 이름을 들었다 하여 그 운명을 완전히 뒤따를 것이라는 보장은 않아. 그러니 부여된 임무가 사라지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알 수 없어. 하지만……. (숨을 들이쉬는 듯 목소리가 잦아든다.)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해. 나는 정원사도, 관리자도, 설계자도 아닌 라이켄의 의지로 말하고 있다고. (또한 그 이름의 뒤에 따라붙은 수많은 족쇄가 제한하는 최소한의 허용 안에서 최대의 자유를 이야기하니, 꼭 인간됨마저 따라하는 것은 일종의 의태이다. 미정의 답안만을 내뱉은 뒤 이어지는 음성은 홀로 결의를 마치기라도 한 양 심지를 굳힌 채였다.)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면 네게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을 거야. 무엇이 다가오건 두렵지 않아. 자, 대답이 되었나?
산티노 페라리:(잘못 이해한 거라고, 내가 죽긴 왜 죽냐고, 호쾌한 웃음으로 넘어가기를 조금은 기대했었나. 단박에 잘라내는 대답이 나오지 않은 시점부터 마음의 문을 닫았다. 지금부터 내리는 모든 결정에 네가 개입할 여지는 없다고 결정한 것이다. 눈길이 네 얼굴 너머의 허공을 향한다. 인간을 흉내낸 작은 머리로 고심하고 내린 결단을 똑바로 보지 못한다. 시선이 어긋난 채, 기계처럼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대꾸한다.) ...어, 정말 믿음이 간다.
그래서, 내 역할은 뭔가? 구체적인 매뉴얼이 필요하다. (어느덧 열아홉으로 돌아온 얼굴이다.)
라이켄:인간을 많이 만나 보지는 못했지만 네 표정은 놀라울 정도로 투명하군. 그런 이야기를 하려면 이 정도는 웃어 보란 말이야. 누가 본다면 내가 아닌 네가 인형이라고 착각하겠어……. (한 손으로 제 입꼬리를 주욱 끌어올리고는 짤막한 웃음소리를 내뱉었다. 구체적인 매뉴얼을 요구하는 것을 실상의 승낙으로 받아들인 것인지, 반도 비지 않은 접시를 뒤로 한 채 다시 지팡이를 집어들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왔던 길을 돌아가는 방향에 선 것을 보니, 굳게 닫아 두었던 철문을 향하려는 모양이었다. 방울 소리가 울렸다.) 도착하면 알려 주마.
산티노 페라리:....... (꼭 지금 해야 하나? 다 먹고 하면 안 되나? 불평불만이 많지만 내색하지 않으며 순순히 일어나 따라간다.)
라이켄:……. (기척이 흐리다 여긴 것인지 뒤를 한 번 바라보고는, 당신의 존재가 여전히 뒤를 따르고 있음을 알아차린 뒤에야 다시 앞을 응시했다. 잠시 걸음을 멈춘 채-) 가기 싫나? (-라 묻는 목소리가 허공으로 흩어진다.)
산티노 페라리:...... ...... ......아니. (대답이 늦다. 걸음을 멈추지 않고 네 옆에 와서 섰다. 계속 가자는 듯이 고개를 까딱인다.)
라이켄:그리 말하면 나는 믿는 수 밖에는 없어. (두 번의 물음은 없다. 옅게 상기된 낯을 한 채 걸음을 재촉하면, 평소보다 걸음이 빨라진 것이 방울의 찰랑임을 통해 이어졌다. 챵, 챵, 맑게 울리는 음색이 겹치면 청량함은 방울뱀의 꼬리에 달린 것과 비슷한 소리로 화하여 철문 앞까지 끊임이 없고……. 마지막 한 번의 흔들림은 그 곳에서 멎는다. 눈을 감은 채 기척을 느끼려는 듯 숨을 붙들었다.)
……. (지금이야. 속삭이듯 중얼거리며 눈을 뜬다. 철문 주변의 땅을 돌아다니며 발로 밟아 보더니, 허리를 숙여 큼직한 상자 하나를 꺼내 끌어올렸다. 그것을 끌어와 철문을 다시 열어젖히고, 상자를 들어올리는 데까지 당신의 역할은 부여되지 않은 채였다. 지하를 눈 앞에 두고 당신을 돌아보는 눈동자에는 긴장의 기색이 역력하다.)
산티노, 준비는 되었나?
산티노 페라리:............. (초점 흐린 눈으로 말없이 바라볼 뿐이다.)
(긴장도 두려움도 없는, 망설임의 흔적 정도만 남은 무표정으로 서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연다.) 하나만 묻지.
라이켄:혼이 나간 낯이나 하고 있기는. 질문은? 답할 수 있는 것이라면 답을 주마.
산티노 페라리:(입을 열었다가 닫는다. 몇 번을 그러는 사이 집 나간 혼이 돌아온 건지, 표정에 생기가 맺힌다. 조그만 소리로 주절거리는 말은, 재앙을 뿌리뽑는 일 직전에 한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맥빠지는 것이다.)
아니... 다른 게 아니고... 이건 가져가도 괜찮지? 훔치려던 건 아니고, 음, 어차피 너도 별 말 없길래 되는 줄 알았고... (도둑이 제 발 저린 표정을 하고 있다. 머릿속 수첩을 넘겨 변명을 찾는다.) 여차할 때 너 되살리려고 그런다. (손 안에서 구겨진 종이를 펴 든다. 이끼의 설계도, 그리고 초승달 모양...) ...농담이다.
라이켄:……. (흐, 작은 웃음소리가 잇새를 비집고 튀어나온다. 이제는 무엇이 되어도 상관은 없다는 양 손을 한 번 휘젓고는, 언어 역시 '가져. 기념품 즈음으로 삼아라.' 따위의 농으로 덧칠해 두는 것이 염원을 눈 앞에 둔 이의 가벼움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구겨진 종이 위를 손으로 붙잡아 구김을 살짝 펴내고는 그 끄트머리를 매만졌다. 입을 벙긋거리며 무엇이라 이야기를 한 것도 같은데-)
네가 무엇인가를 쌓아올려 내 이름을 붙인다면 그것이 나의 재생이 되겠지.
(-속삭임에 가까운 말 몇 마디. 답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양 먼저 지하를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이번의 걸음에는 방울소리가 뒤따르지 않으니 그야말로 무인의 걸음이다.)
산티노 페라리:(종이를 접어 주머니에 넣고 주인에게 버려진 지팡이를 들었다. '기념품으로 챙긴다면 이것도.' 들릴락 말락 한 소리로 중얼거리며 계단을 내려간다. 방울소리 탓에 기척을 숨기려 해도 그럴 수 없는 상태에서 묘한 불안정함을 느꼈는데, 그 불안정에서 오래 입은 옷과 같은 안정감을 느꼈다.)
방울 소리가 당신을 따르니, 그 기척을 알아차릴 필요도 없다는 양-
혹은 뒤를 도는 순간 그 존재를 지상에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오르페우스의 마음이라도 지닌 양,
라이켄은 한 번을 돌아보지 않으며 지하를 향해 걷습니다.
태양의 위치로 미루어 보아 대강 오후 세 시 즈음인가?
그 시간이 무색하게 당신의 세상은 밤에 잠겨갑니다.
완연한 어둠에 잠길 때 즈음, 라이켄은 숨을 죽여 이리 말합니다.
라이켄:이 곳에서 기다려, 안 쪽에 해 둘 일이 있으니까.
라이켄:네가 위험해지겠지. 소란을 피웠다가는 그것들이 네 존재를 알아차리게 돼. ……. 산티노.
산티노 페라리:음. .......한숨 자고 있어야겠군. (눈을 감고 벽에 기댄다.)
라이켄:(코웃음 한 번.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삐뚜름하게 기울이다, 슬그머니 한 걸음 다가서 응시했다.) 잔다고 하니 말은 않아도 되겠군. 얼마 걸리지 않을테니 잠시 눈만 붙여.
(손가락을 내어 호흡을 가늠해 본다. 정말로 잠에 든 기색은 아니나 마지막을 실감하면 자연히 수많은 가식-존재하지도 않았던 것마저-이 떨어져 나가는 것이었다. 산티노, 그리 다시 한 번의 호명. 희미한 목소리가 흩어져 동굴과도 같은 복도에 울린다.) 비록 너를 이용한다 일렀으나, 네가 무사하기를 바라 모래 속에서 너를 건져냈던 것 역시 내 진심의 일부였어. 여전히 네가 무사하기를 기원해. 마음이 바뀌었다면 저 문을 열고, 뒤를 돌아보지 말고 앞으로 주욱 달려가. 그리 한다 해도 네가 이 사막에 삼켜지는 일은 없겠지.
(그것을 마지막으로 이어지는 말은 없다. 옷매무새를 한 번 정돈하고는 그림자 속으로 뛰어든다…….)
그 색채가 사라지고 나면 어떠한 기척도 없앨 수 있을 정도로 어둠을 닮은 당신만이 홀로 남습니다.
행여 저 아래에서 라이켄이 당장 뱀을 완성시키기라도 한다면?
꿈 속의 움직임을 기억합니다. 작은 손은 짧은 시간 안에도 어렵지 않게 수많은 것들을 만들고 그것에 생을 불어넣어 왔습니다.
저것 역시 라이켄을 자칭한다면, 그가 똑같은 행동을 이 곳에서 보일 수 없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지금 당신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 생각은 무엇인가요?
산티노 페라리:....... (어차피 나를 밖으로 인도해 줄 이는 라이켄밖에 없었다. 이곳에서 나가면 어디로 향해야 할지도 기억해 내지 못했다. 그러니 선택한 게 아니라 떠밀려 온 것이다. 단지 그뿐이라고... 눈을 감은 채 생각을 비웠다.)
길을 박탈당했을 적의 감각은 꿈에 불과한 일이었음에도 선명합니다.
그 때에도 바깥으로 당신을 인도했던 자는 우습게도 라이켄이었던가요!
당신의 선택과는 별개로 바깥을 향해 떠밀려 나가던 감각을 기억합니다.
풋내 그득한 공기, 열리는 문, 타인의 행복 속에서도 들려오지 않던-
라이켄:……. 산티노. 정말 잠에라도 들었나?
기척조차 없이 다가온 라이켄의 음성이 공허한 흐름을 차단합니다.
산티노 페라리:(진짜도 아닌 주제에, 네 온실 안에 들여준 것만으로 내가—— 생각이 끊어진다. 한쪽 눈을 뜬다.)
떠날 적과는 달리 손에 들린 것은 헝겊 줄과 병 하나 뿐.
당신이 눈을 뜨면 라이켄은 어둠 속에서도 퍽 선명히 빛나는 미소를 띄웁니다.
라이켄:이제
역할을 부여할 때인데 꿈을 여행하면 못 쓰지. 단 꿈을 꾸었나?
라이켄:(한 손으로 병의 마개를 열고는 쥐고 있던 줄을 금빛 액체로 흠뻑 적셨다.) 이런, 내가 방해를 한 모양이군 그래……. 미안하게 되었어. (주머니 속에서 성냥 한 갑 꺼내 당신의 손에 쥐어 주고는 빈 손을 헝겊에 쥔다. 양 손이 기름에 젖어 희미한 빛 속에서도 번들거린다. 몇 걸음 아래에 서 당신을 향해 손을 뻗는다.) 자. 할 일은 단순해.
여기에 불을 붙여. 네 손길이, 네가 이끌어 온 화마가 이 곳으로 옮겨지게끔 해. 불이 붙으면 주변의 열기 때문에 너를 찾지 못할테니, 내가 알려 주었던 길을 따라 가면 너는 안전할 거야.
산티노 페라리:(성냥갑 안을 확인하고 닫는다. 무심한 눈길이 너를, 네가 쥔 심지를 한참 바라본다. 눈을 열 번은 깜박일 시간이 흐르고 나서.) 기름 병인가? 그거.
라이켄:이제는 빈 병이지. (짤막한 답. 줄을 붙잡고 있는 오른손은 힘이 풀릴 줄을 모르고, 당신을 향해 뻗은 왼손도 흔들림 하나가 없다. 스스로를 도화선 삼은 지금에서도 두려움이라 할 것이 없는지 눈 한 번을 깜박이지 않았다.) 식용은 아니니 안심해.
산티노 페라리:성냥은? 만든 건가? (성냥갑을 돌리며 요모조모 살펴본다.)
라이켄:공산품이다. 행상인에게서 샀어. ……. 이리저리 묻는 것이 많은 게,
두려운가? 산티노 페라리:행상인도 드나들고, 문이 늘 닫혀 있는 것도 아니었군. 착각하지 마라, 샴푸도 면도칼도 안 보이는데 이런 건 있는 게 신기해서 묻는 거니까. 식용 기름은 아니라니 너를 구워 먹을 수 없어서 안타깝게 되었네.
라이켄:(한 마디의 물음과 희미한 웃음소리 한 번, 그 뒤에 덧붙여지는 음성은 퍽 부드럽다. 당신이 기억하는 한, 이것은 타인을 달랠 적, 또는 설득시킬 적에나 흐르는 목소리-당신이 정의하기를
위선이라 이르는 음성이다.) 위안이 될 법한 말을 하나 해 주지, 산티노. 이것은 나를 위한 일이야. 그리고 위협이 될 말을 하나 덧붙이자면, 들키기 전에 끝내야 해. 두렵지 않다면 주저할 것도 없지 않나?
자, 어서……. 나를 부숴. 이 곳을 불태워. 내게 부여된 관리자의 이름을 지워 줘. 내가 일군 정원이 누군가의 절망이 된다면 그 정원을 무너뜨리고 그 정원사에게 걸맞는 마지막을 적어내. 이 장에 마침표를 찍는 거야……. 최후에는 너의 이름만이 남을 수 있도록.
산티노 페라리:애 대하듯 하지 마라. 죄책감 같은 건 안 느낀다. (재수없는 목소리는 흘려들으며 고개를 기울인다.) 성냥은 이거밖에 없나? 가져갈 성냥이 더 있으면 좋겠다. 있으면 있다고 말을 할 것이지. 담뱃불 붙일 게 필요했는데. (마지막을 유예시키고자 이말 저말 가라지 않고 주워섬긴다.)
라이켄:이 곳에서 불을 피울 일은 드무니 그 성냥이 고작이야. 흡연을 하나? (담담히 물음을 던지고는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아쉽지만 성냥은 그게 전부야. 이 곳에서 나가게 된다면 아껴서 사용하도록 해.
산티노 페라리:(
들키기 전에 끝내야 해. 시간적 압박 탓에 초조해졌다. 손목을 들지만 시계는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팔아버렸다.) ......왜 행상인에게 부탁하지 않았지? 아무나 끌어들여도 상관없었잖아. 그것도 대의를 위한 일인데.
라이켄:질문이 많군. 이 일은 하루 아침에 달성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 반드시 성공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있을 때, 방아쇠를 당겨 줄 이만이 존재한다면 결코 일이 틀어질 일은 없으리라는 확신이 있을 때가 아니면 누구도 끌여들일 수 없었어. 일이 완성되기 직전, 하지만 온실이 완성되기도 전……. 바로 지금이 아니라면 할 수 없었던 거야.
산티노 페라리:(가치를 인정받고 싶었다.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었다. '네가 중요하다'고 말해주는 사람은 누구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때 꿈에 네가 나왔다. 그 뒤로 오직 한 가지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었다. 나아갈 방향을 잃은 것도 당연했다. 더 이상 남의 무리에 속할 마음이 사라졌던 것이다. 대신에 나침반은 한 허상의 존재만을 가리켰다—
라이켄에게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다.)
(사막에서 쓰러지고 네게 구해진 것 역시 운명 같았다. 라이켄에게 특별해지고 싶었다! 그래서 그를 닮은 인형에게조차 관심을 구걸하고 있다. 이렇게 끝을 내면 네게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네 유일한 살인자가 된다. 하지만,) ...역시 억울한데. (라이켄에게 수모를 당한 기억, 복수하려다 실패한 기억, 한바탕 싸웠다 다시 이어붙이려고 애를 쓰던 기억 모두 나만 가지고 있다는 것이.)
지금이어야 하는 이유는 있지만, 나여야 하는 이유는 없군.
나는 너를 원망하지 않고, 너는 나에게 책임감을 느낄 이유가 없다. 그래서야. 그래서 안 되는 거야.......
(성냥을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멍한 눈빛이 허공을 헤맨다.) ......뱀이 바다를 건널 수 있나? (재앙이 자기가 사는 곳까지 집어삼키지 않는다면 그만두겠다는 뜻을 담은 의문이다. 일이 틀어질 리 없으리라는 확신이 있어서 끌어들였다고. 그런 결정적인 순간에 방아쇠를 당기지 못해서 미안하게 됐다. 웃기지도 않는 사과를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라이켄:뱀은 바다를 건널 수 없지만 그것들은 지구의 존재가 아니다. 넌, (컥, 음성이 틀어막힌다. 혀가 안으로 휘말려 들어가 언어의 구사를 막으니 존재하지도 않는 숨이 덩달아 멎는 착각이 들어 목을 움켜쥐었다. 마른 기침과 헐떡임, 그 중에도 소리가 크게 새어나가지 않도록 제 입을 틀어막으나 천을 쥔 손은 더욱 강하게 도화선을 그러쥘 뿐이었다.) 허억, 흑, 으……. …….
(숨을 고르려는 듯 어깨가 심하게 들썩인다. 기름이 묻은 손으로는 머리카락을 정돈할 수도 없어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한 머리칼이 흐트러진 채 당신을 마주할 수 밖에 없었다. 우회적으로 위협을 알리는 목소리는 끄트머리가 갈라져 볼품이 없으나 날것의 진의는 선명하게도 주의의 붉음을 드러내고는 한다. 그는 진실된 우려, 한 번 붙잡아 제 땅으로 들였던 이에 대한-) 뱀은 먼 곳에 떨어진 사냥감이라도 열과 냄새를 통해 분간할 수 있어. 그들이 땅을 집어삼키는 일은 없을지언정, 쥐 한 마리를 삼키는 것은 일도 아니지. (-책임. 고향을 잃는 개인의 역사 없이도 수많은 상실을 눈에 담아 온 이는 그 감정만을 모방이 아닌 진의로 지닌다. 가슴팍에 손을 얹는다. 심장이 뛰지 않는 차가운 몸은 인간보다는 차라리 식물을 닮아 있다.)
맞아, 산티노. 꼭 너여야만 하는 이유는 없지. 네가 그 이유로 이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나아간다 한들 나는 너를 원망할 수 없어.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유로운 존재이니……. 선택을 할 권리는 무엇에도 묶이지 않은 네게만 있겠지. 이해한다. 하지만, 하나는 틀렸어. 나는 네게 책임감을 느낄 이유가 있어. 내 손으로 붙들어 내 손으로 구하고, 삶이라 부르기에도 억지스러운 이 생을 더해 죽어가던 것을 재생시켰다는 이유만으로, 그 재생된 삶이 이어지기를 바란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만으로. 그러한 주제에 나의 삶에 있어 유일한 진짜의 존재를 빌어 허상 바깥에 손을 뻗겠다며 오만하게도 그 생을 이용하려 했다는 이유만으로 죄책감을 느껴 마땅해.
불을 붙이는 것은 네가 되어야 할 필요가 없으나, 이 정원사의 삶에 있어 산티노 페라리의 이름을 남기는 법에 대한 결정은 네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어. 그것에만은 네가 필요해. 나는……. 관리자는 그런 결정을 내리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니, (고개를 숙인 채 말라가는 손을 내밀었다. 여전히 번들거리는 빛이 남아 있으나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듯 오목한 부분의 맥이 발광하는 동굴 속의 이끼처럼 반짝인다.) …….
부디.
산티노 페라리:(무표정의 벽이 깨진다. 숨이 막힌 듯 헐떡이는 너를 향해 다가섰지만, 섣불리 손을 대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하기만 했다. 네가 목소리를 내자 긴 숨을 내쉬며 티가 나게 안심한다. 어차피 추적당할 거라는 암울한 내용은 귀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다.) 몸을 숨기는 것쯤이라면 잘할 자신 있다. (
의태는 모든 것이 무너진 순간에도 유일하게 확신하는 자신만의 재능이니까. 하물며 자기가 소유한 인형을 내키지 않으면 들여다보지 않고 내버려 두는 신격이라면, 피해 가기 어렵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라면 허튼 마음을 먹게 방치하지 않았을 텐데, 위대한 존재라면서 허술하기 그지없다!)
웃기지 마라....... 인형 주제에 위선도 갖가지로 부리는군. (헛웃음과 함께 속삭인다. 식물이나 인형이나, 스스로 가꾼 절망의 정원을 타인의 선택을 빌려 바로잡으려 하는 꼴이 똑같다.) 네가 나를 안다면 결코 내가 적임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텐데. 자신이 없다. 왜 내가 이런 엄청난 일에 휘말려야 하는 거지? 왜 내가...! 하지만 이 귀중한 기회를 뿌리칠 수도 없지. 다른 놈에게 빼앗기기는 싫거든.
예전에, 내 머릿속에서 탄생한 존재로부터 이런 저주를 받았지. (꿈에서 들은 말 중 하나를 인용한다.) 너는 그 속물근성과 탐욕 때문에 망할 거라고. (과연, 너를 내려다보는 눈빛에는 소유에 대한 갈망이 가득하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은 심드렁한 부정이다.) 네 삶에 이름을 남겨서 어디에 쓰나? 넌 내가 아닌 라이켄이 아닌데. 이야기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마지막 장을 덮을 수는 없지.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건... 내가 가지고 싶은 건...
그래, 기념품이 더 필요하다. 종이니 지팡이니, 왜 하찮은 것들을 챙기려고 들었을까? 실물과 똑같은 걸 가져가면 충분한데! (뻗은 손을 잡아끈다. 나무 위쪽에 손이 닿도록 도왔을 때처럼, 허리를 잡고 들어올려 어깨 위에 들쳐멘다. 계단을 달음박질로 올라간다. 가쁜 숨 사이로 원망의 말을 뱉는다.) 선택지를 주지 말지 그랬어....... 이걸로 수많은 사람들이 위험해지면 너 때문이다.
라이켄:잠깐만, 산티노……. (저항을 할 틈도 없이 몸이 들어 올려진다. 무표정함이 깨어지는 것은 이 쪽도 마찬가지, 쥐고 있던 천을 놓치면 짤막하게 아, 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철문을 박차고 나와 밝은 햇살을 마주하면 애석하게도 그 자유를 눈 앞에 둔 채 피어나는 표정은-)
허나 그 의태를 분간하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눈 뿐,
당신을 응시하는 시선의 주인은 색과 몸가짐으로 모습을 알아차리는 이가 아닙니다.
서늘한 시선이 내리꽂히는 감각이 들었다면 착각이 아닐 것입니다.
라이켄:내가 이야기했잖아,
뱀은 먼 곳에 떨어진 사냥감이라도 열과 냄새로 분간을 할 수 있다고……. 왜 다른 방법이 아닌
불을 고집했겠어.
귓가에 스치는 목소리에는 선명한 두려움이 서려 있습니다.
산티노 페라리:(목적성을 잃은 인간은 꿈속을 유영하는 감각에서 줄곧 벗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뒤통수에 꽂히는 서늘한 시선 또한 허상의 존재가 내뱉는 비난의 말 정도의 날카로움이라고 지레짐작한다.)
신의 눈을 속이려는 노력조차 없이 그 모형정원의 일부를 앗아가려 하다니,
진정 뛰어난 것으로 재능을 가렸더라면 당신의 재능은
탐욕이 되었어야 했을 터입니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지상을 향해 나아갑니다.
저 뒤를 보는 순간 겨우 얻어낸 당신의 사랑마저 잃을까 두려웠나요?
지하의 서늘한 중력은 인간의 힘으로 끊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서늘함이 날카로움으로, 날카로움이 뜨거움으로 변하는 것은 한 순간.
그것을 적시는 것은 약초로 달인 차가 아닌 자신의 비릿한 피,
복부로 전해져 오는 강렬한 통증과 함께 눈이 천천히 감겨옵니다.
─────── END 5 ───────무제의 기록: 모형정원 안에서